문화예술편 (19)이종산과 방어진중학교

▲ 이종산씨는 해방 후 교육환경이 척박했던 울산 동구 지역에 중등교육기관인 울산방어진중학교를 설립했던 인물로 지금도 동구 주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동구 일산동 옛 방어진중학교터 인근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는 방어진중학교 1회 졸업생들이 그의 높은 뜻을 기려 세운 송덕비가 있다.

1896년 동구 남목서 태어나
일산진서 후리어장 운영, 큰 돈 벌어
해방 되면서 교육사업에 투자
사유지 3만4천평과 거액 내놓아

1947년 방어진수산초급중학교 세워
30년간 동구 유일 중등교육기관 우뚝
1959년 ‘방어진중학교’로 공립 전환
1990년 화정동 이전…본터는 수련장
수련장 인근에 산소·송덕비 자리

울산교육사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울산 동면(현 울산광역시 동구)의 이종산씨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 동구가 울산에서 먼 지역이 아니지만 해방 무렵만 해도 동구는 울산에서 동떨어진 곳이었다.

이러다보니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자녀들의 교육문제였다. 해방 후 울산에는 울산농고에서 제일중학교가 분리되고 울산중학교가 세워지는 등 중등교육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구는 중등교육기관이 없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학을 못했다.

이런 때 동구 학생들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를 세운 인물이 이종산씨다.

이씨는 1896년 동구 남목에서 부친 이규진과 모친 박춘례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두 형은 자라면서 공부를 할 기회를 얻었으나 자신은 공부를 못한 것을 늘 가슴에 한으로 삼고 살았다.

그가 남목에서 일산동으로 온 것은 처가가 일산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산동에 살았던 박준이씨 딸 영식과 결혼 해 일산동 425번지에 자리 잡았다.

그가 돈을 많이 번 때는 해방 전후 일산진에서 후리어장을 운영할 때다. 처음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후리어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그 후리어장을 인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후리어장을 인수한 후 물고기들이 엄청나게 일산진으로 많이 몰려와 부자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집도 일산진 해안으로 옮겼다. 당초 그는 일산진 번득 마을에 집을 지어 살았지만 그 후 현재 경비초소가 있는 일산 해안으로 큰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이 집은 이씨가 돌아간 후 그의 아들 율우씨가 개축해 울미여관을 운영했다.

당시 이 마을에 살면서 이씨 집을 자주 방문했던 이병우 동구문화원 부원장(70)은 “해방 후 이종산 어른이 얼마나 잘 살았던지 이씨 집에는 일산진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왔고 전화까지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씨가 어장운영으로 번 돈을 교육사업에 투자한 것은 해방이 되면서다. 일제강점기 울기등대에는 일본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이 물러간 후 이 땅을 사들였던 그는 해양입국을 위해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땅 중 사유지 3만4000여 평과 거액의 현찰을 학교 건립을 위해 내어 놓았다.

이렇게 해 1947년 10월에는 해양학회가 설립되고 12월에는 방어진수산초급중학교가 세워졌다. 당시만 해도 동구에는 방어진·남목·화진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 없었다. 그런데 수산초급중학교가 세워짐으로 이들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 학교를 통해 선후배 관계가 형성되어 지역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 학교는 1977년 현대중학교가 설립되기까지 동구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학교가 세워지자 방어진과 일산동은 물론이고 멀리 남목과 심지어 주전에서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학교 5회 졸업생으로 50년대 중반 주전에서 이 학교를 다녔던 김장배 전 울산시교육위원회 의장은 “주전에서 방어진수산초급중학교까지 걸어서 가려면 2시간 가까이 걸렸기 때문에 매일 새벽밥을 먹고 주전에서 미포마을과 전하동을 지나 일산해수욕장을 걸어가야 했는데 일산해수욕장의 모래밭을 걸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또 “당시 동구의 척박한 교육환경을 생각할 때 우리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이종산 선생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김 전 의장은 그의 형도 방어진수산초급중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부산상고로 전학을 갔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학교 설립 후 초대 교장로 설두하씨가 부임했다.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는 설 교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울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가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때가 1951년 7월이다. 당시 졸업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이 사진을 보면 설 교장을 비롯해 교사가 10여명이 되는데 반해 학생 수는 남자가 19명 여자 3명 등 22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교사에 비해 학생 수가 적은 것은 1회 졸업생 대부분이 학업 중 6·25가 터지는 바람에 학도병으로 전선으로 갔기 때문이다.

나중에 울산제일 중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친 김창식(92)씨는 당시 이 학교에서 수산을 가르쳤다. 또 성남동 시민약국 자리에 있었던 화신백화점 딸도 이 학교에서 가정을 가르쳤다.

이씨가 이처럼 고귀한 뜻으로 설립한 학교지만 학교운영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 때만 해도 학교가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어 교사 월급은 물론이고 학교 운영에 소요되는 제반 비용을 학교 법인의 기본재산만으로 충당하다 보니 재정이 어려워 1959년에는 교명을 ‘방어진중학교’로 바꾸고 공립이 되었다.

이때는 아쉽게도 설립자 이종산씨가 서거한 한참 후다. 이씨는 오래 살지 못했다. 1949년 향년 52세로 눈을 감은 후 이 학교는 그의 장남 율우씨가 맡아 운영했다. 가족들은 이씨가 타계한 후 현재 현대중공업 영빈관이 있는 둘안산에 묻었다.

그러나 이 무덤은 1952년 방어진중학교가 있던 등대산 현재의 산소 자리로 이장했다. 주위 사람들에 따르면 그의 무덤이 이장되고부터 집안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자꾸 일어나 결국 학교를 넘겨야 했다고 말한다.

그가 타계한 후 학교운영을 맡았던 율우씨는 처가가 울산 박씨로 현재 옥교동주민센터 바로 앞에 있었다. 어릴 때 일본 유학으로 중학교를 마쳤던 율우씨였지만 세상 물정에는 밝지 못해 학교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1959년 이 학교가 공립이 된다.

이때 율우씨는 아버지의 높은 뜻을 받들어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학교를 넘겼다.

1950~60년대 이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 요즘도 존경하는 스승이 변재호 교장이다. 부산사범을 졸업한 후 울산에서 주로 초등학교 교장으로 지내다가 학교 재정이 어려울 때 이 학교 교장으로 와 학교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당시 그는 학교에서 가까운 사택에 살았는데 이 무렵 고은 시인이 이 사택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고은 시인은 1958년 환속과 함께 <폐결핵> 시집을 출간했는데 그는 이 시집을 출간하기 전 풍광이 좋은 변 교장 사택에서 2개월 정도 머물면서 <이중섭 평전>을 구상했다.

울산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990년 5월 현 방어진중학교가 있는 화정동으로 옮겨지게 되고 옛 방어진중학교 자리에는 대신 교원과 학생들의 수련장이 들어섰다.

이씨 산소는 현재 수련장이 있는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울기등대 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대왕암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다. 산소 입구에는 아무런 표지석이 없고 산소로 들어가는 길도 따로 만들지 않아 산소를 찾는 사람들은 풀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수련장 인근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가 2기 있다. 하나는 재단법인 해양학회가 그가 타계한 2년 뒤인 1951년 옛 교정에 새운 비고 다른 하나는 그의 산소에 1회 졸업생들이 그를 추모해 1979년 세운 송덕비다.

해양학회 비에는 그의 업적을 이렇게 써 놓고 있다. “공은 익제공의 후예다. 태어나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더니 광복 후 토지와 현금을 바쳐 방어진수산중학교를 세워 지방 청년들이 진학하는 길을 열었다. 교육사업에 투자하는 일은 가끔 있지만 온 재산을 모두 교육 사업에 바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어진중학교는 그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김장배 전 울산시교육위원회 의장 외에도 부산 사범 출신으로 울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전인철과 이덕출 전 인하대학 부총장이 이 학교 4회 졸업생이다. 부산지방 국세청장을 지낸 장세원과 김이후 소아과 원장 그리고 진덕규 전 이화여대 교수, 안기부울산출장소장을 지냈던 김남한이 5회다. 오성웅 전 울산수협조합장이 7회고 울산시인협회장을 지냈던 한석근이 8회다. 3선 국회의원 김운환이 11회고 서울에서 교수로 활동했던 그의 형 운건도 9회다. 전 동구청장 정천석은 20회다. 용연 출신으로 울산매일신문 사장을 지냈던 박만식도 졸업은 못했지만 50년대 이 학교를 다녔다. 박씨는 “당시 주위 사람들이 수산업이 장래가 있다고 해 방어진에 있던 누나 집에서 이 학교를 다녔으나 6·25가 일어나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두었다”고 말한다.

방어진중학교 옛터는 최근 동구가 이곳에 해양박물관을 세우겠다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곳에 해양박물관이 들어서는 것도 좋다. 그러나 해양입국만이 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보통 사람들이 자신만의 명리를 생각할 때 사재를 아낌없이 내어 놓은 이씨의 높은 뜻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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