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정문 전 강남교육장

근래 공관병의 갑질 사건과 국정논란과 적폐청산 및 인사청문회 등을 통해 과거 본인의 발언이나 행적 등이 부메랑이 되어 많은 대상자가 발목을 잡힌 경우가 많았다. 많은 공직자들에게 평소 언행일치, 지행합일의 처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 주고 있다. 율기장(律己藏)에도 ‘오직 선비의 청렴은 여자의 순결과 같아서 한 오래기의 오점도 평생토록 흠이 된다. 어두운 밤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알고 산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 마음의 양심까지 속일 수 있겠는가’라고 자기의 성찰을 강조했다.

이세규(李世圭) 장군은 육사 7기로 임관해 동기생 중 38세에 제일 먼저 장군으로 진급했다. 11사단장 때 1966년 5·16민족상(교육부문)을 수상한 장래가 촉망되는 군인이었다. 임지로 면회 간 부인과 자녀들은 “민간인이 군의 식량을 축낼 수 없다”는 고집 때문에 서울에서 쌀과 부식을 가져가야 했고 군용 차량에 발도 못 올리게 해 관사로부터 버스 터미널까지 몇 ㎞를 걸어 다녀야만 했다. 5·16혁명 후 중앙공무원 교육원장으로 임명돼 각국을 시찰해 ‘세계 공무원교육개요’를 발간했는데 각국 시찰에서 남은 여비 11만2022달러를 국고에 반납한 청렴한 군인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남달리 받던 장군이었으나 사단장으로 3선 개헌을 완고히 반대해 결국 군복을 벗었던 소신있던 장군이었다. 그 후 1971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안보특보로서 제8대 전국구의원(국방위원)으로 진출해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에 수용되었던 특수부대요원 24명이 경비병 18명을 사살하고 인천을 경유, 서울 대방동까지 진출해 자폭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국은 ‘무장공비’로 발표했으나 이세규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특수부대원’으로 폭로했던 것이다.

1972년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자 군 정보기관에 3~4차례 잡혀가 군부내 인맥과 제보자의 명단을 대라는 것과 유신지지 성명을 내달라는 것이었다. 끝까지 심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66세에 유명을 달리했다. 고인이 생전에 실천으로 보여준 청렴과 기개는 참군인의 길을 깨닫게 하고 있다.

효봉(李燦亨) 스님은 일본 와세다법대를 졸업하고 일제 때 한국인으로 최초의 판사가 된 분이다. 36세 때 평양고등법원에서 법관생활 10년째 되던 해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가 진범이 잡히는 바람에 오판이었음이 판명됐다. 즉시 판사직에 회의를 느끼고 가족에게도 아무런 연락없이 엿판을 마련해 3년 동안 엿장수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나그네 엿장수의 발길은 금강산 신계사 석두 스님을 만나 스님이 되어 79세로 열반하기까지 사형선고의 오판을 항상 반성하면서 불도에 정진했다.

인생은 왕복차표가 없다. 그러기에 한번 떠나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지나간 인생의 흠집은 수정이 불가능하다. 정직한 사람이 때로는 어리석은 듯 보이고 거짓말을 하는 간교한 사람이 오히려 영리해 보이는 세상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자기만 옳다는 ‘내로남불’의 외골수 신념들이 흘러넘친다. 그런 신념 때문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훼손되어 가고 있다.

‘시저의 아내에게는 소문만 있어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시저는 아내가 불의를 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아내를 내쫓으면서 한 말이다. 공직자에게 부정이나 비리의 소문만 있어도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소문이 난다는 것은 공직자의 덕망이나 신뢰가 흔들린다는 증거다.

요즘 지도급 공직자들이 공·사 구별에 사려 깊지 못해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변명이 정직하지 못할 경우엔 더욱 지탄을 받는다.

공직자에게 공과 사의 구별이 병들면 지도력의 자정능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공직자가 감옥에 가고는 온갖 수모를 당한다. 갈 곳과 못 갈 곳, 받아야 할 돈과 물리쳐야 할 돈, 할 일과 못할 일, 어울릴 사람과 멀리해야 할 사람, 갈 시기와 못갈 시기를 확실히 구별하여 지뢰밭을 밟지 않아야 한다. 공직자가 걷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언제 밟아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고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된다.

윤정문 전 강남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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