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여옥 대비가 수경에게 말했다.

“그래도 박지 집사는 협상으로 나라를 되찾은 일등공신이 아닌가? 하지왕의 즉위식까지 훌륭하게 치른 그를 내치면 백성들이 뭐라 하겠나?”

“박지 집사는 광개토왕이 포로로 준 목라근자를 볼모로 잡고 협상을 했습니다. 게다가 제 남편인 후누 장군의 군사적 성공이 없었다면 목만치와의 협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야.”

“헌데 지금은 박지가 공을 독차지하면서 죄 없는 자들도 숙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을 심어 패거리 정치를 하며 국정을 농단하고 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국간인 박지를 찍어내야 합니다.”

섭정 대비가 대가야의 국격을 회복하고 단절된 대외관계를 복구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노회한 박지는 인사에 눈을 돌려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박지는 홀몸으로 섭정을 하고 있는 왕비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회령대왕과 광개토태왕, 걸출한 두 대왕을 모신 여옥이었다. 웬만한 여자라면 자신이 직접 상대하겠지만 자신은 여왕과 격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대비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몸이 뜨거운 서른의 젊은 청상이었다. 박지는 자신의 세작을 풀어 가야, 고구려, 신라까지 신체 건장하고 잘 생기고 구변이 좋은 장정을 찾도록 해 결국 신라에서 근대라는 한 남자를 물색해 왔다. 박지는 근대를 보고 박수를 쳤다. 즉시 그에게 궁형을 가해 내시로 만들어 대비의 침전에 시중들게 했다. 이후 박지의 힘은 고구려의 고상지 도독 아래 집사로 있을 때보다 더 좋아보였다.

“수경, 박지 집사는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는데다 하지왕마저 그를 따르고 있어 함부로 찍어낼 수 없어.”

“대비마마의 뜻은 어떠신가요?”

“조정의 국무는 박지 집사가 하고 국방은 후누 장군이 맡고, 수경이 나의 섭정을 보필해 주는 현재의 상태가 좋아.”

“만약 제가 섭정을 보필하는 자라고 생각하신다면 박지 집사를 내치소서. 정치를 사사로운 물건으로 만들어 개인적 치부를 하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자입니다. 더욱이 왕과 대비와 저를 죽이려던 음흉한 자입니다. 장차 조정의 큰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여옥은 수경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동무 수경을 누구보다도 믿고 그의 말을 존중했다. 고구려까지 가서 자신과 꺽감을 시중들었고, 꺽감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준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알겠네. 난 누구보다도 수경, 자네를 믿네. 일단 개인의 치부에 대해 수경이가 은밀하게 조사를 해주게.”

“알겠습니다.”

수경은 비로소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박지를 내쳐야만 남편인 후누가 조정과 국방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도 과거 자신을 농락해 육체적 관계를 맺고 고상지 도독에게도 알선했던 늙은 박지가 조정에서 부딪치는 게 부담스럽고 거리껴졌다.

 

우리말 어원연구

늙은이:[S] nirigauni(니리가우니), old man. ‘니리’가 압축되어 ‘늙’이 되었다. 늙은이는 ‘니리간 사람’으로, ‘니리가다’ ‘내려가다’와 ‘늙다’의 어원은 같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