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언양향교와 전통혼례

▲ 전통혼례에서 신랑과 신부의 모습.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 ‘언양향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정
최근 유림회관 건립 평생교육원 역할
효행아카데미·한문서당·서예실 운영

 

가을 하늘이 쾌청하다. 쾌청(快晴)으로 치자면 어디 하늘뿐이랴! 가을은 기온조차도 맑고 산뜻하다. 국어 학자이자 시조시인이었던 이희승 선생은 푸른 가을 하늘을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이라는 비유를 통해 청정무구(淸淨無垢)의 가을하늘을 시의 언어로 표현해 냈다. 하늘은 청명하고 기온조차 산뜻한 날, 전통혼례예식으로 금슬상화(琴瑟相和)에 천생연분(天生緣分)을 이루어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 위치한 ‘언양향교’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은 날이 더욱 좋다. 시집가고 장가가기에 더 없이 좋은 가을날이다.

▲ 언양향교.

붉은 황토와 돌을 섞어 쌓은 담을 거쳐 정갈한 정문을 지나자 먼저 홍살문이 눈에 들어온다. 충·의·예·효를 칭송하고 이에 대한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에다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는 붉은 홍살문, 그 오른편에 언양향교 안내판이 서있다. 안내판에 또렷하게 적혀있는 글을 한 자도 놓치지 않을 요량으로 또박또박 읽어 내렸다.

“향교는 조선시대 공식적인 지방 교육 기관이다. 향교 건물은 문묘(文廟)와 학당(學堂)으로 이루어진다. 문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사성(四聖)·이현(二賢)과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을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그리고 학당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서재(東·西齋)가 있다.”

언양향교는 본래 반월산 아래에 있었으나, 1696년(숙종 22년)과 1700년(숙종 22년)에 두 차례에 걸쳐 현재의 장소로 옮겨 세웠으며, 그 후 두 번에 걸쳐 고쳤다. 언양향교는 일반적인 지방향교의 배치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성전 축과 명륜당 축이 어긋나있고, 동서무가 없으며, 대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겹처마 익공(翼工)양식의 맞배지붕집이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익공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 신부가 초례청까지 타고올 꽃가마.

조선시대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국립교육기관으로 창건된 언양향교,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처음에는 반월산(半月山)아래 세웠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그 뒤 화장산 아래로 옮겼다가 또다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행하고 있으며 현재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을, 언양향교의 모든 관리와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복인규 전교(典校)로부터 더욱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최근에 건립된 유림회관을 통해 인성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는데, ‘언양향교 평생교육원’을 통한 효행아카데미를 비롯 한문서당, 서예실, 어린이 체험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수강생들로부터 큰 호응 얻고 있다고 하니 전통혼례예식과 더불어 더 한층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계단을 올라서자 태극무늬 문고리가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입덕문(入德門)이 정갈한 자태로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동재, 서재를 좌우로 하고 명륜당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명륜당 앞에 초례청이 마련되어 있었다.

전통혼례(傳統婚禮)의 절차(節次)는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폐(納幣), 청기(請期), 친영(親迎)이라 하여 육례(六禮)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홍중표 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회장

먼저 신랑 집과 신부 집이 서로 혼사를 의논하는 혼담 절차가 있은 다음, 남자 측의 어른(아버지)은 여자 측의 어른에게 혼인하기를 청하는 청혼서(請婚書)를 보낸다. 남자 측의 청혼서를 받은 여자 측에서 다른 의사가 없으면 혼인을 승낙하는 허혼서(許婚書)를 보내면서 전통혼례는 시작된다.

남자 측이 청혼했고, 여자 측이 허혼했으니까 정혼(定婚)을 해야 하는데 이 정혼절차가 납채(納采)이다. 남자 측에서 여자를 며느리로 채택한다는 뜻을 여자 측에 보내는 절차인 것이다. 그 다음 납기(納期)는 곧 택일(擇日)인데 신랑 집의 납채서에 혼인 날짜를 청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신부 집에서 택일을 해 신랑 집에 보내는 절차이다. 신부 집에서 기일을 정하는 이유는 혼인예식의 준비는 신부 집이 더 복잡하기에, 신부 집에서 날짜를 선택해 신랑 집에 보내는 절차를 납기라 한다.

이윽고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혼인 승낙에 대한 감사의 편지와 함께 신부용 혼수와 예물을 보내는 절차가 남아있는데, 이를 납폐(納幣)라 하고 이때 보내는 것을 함(函)이라 한다. 그리고 이 절차가 마무리되면 비로소 혼례식(婚禮式) 즉 대례(大禮)라는 혼인예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전통혼례는 이러한 절차와 의식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비교적 간소화되어있다는 설명을 오늘 있을 전통혼례예식에 도움을 주고 있는 전통예절지도사로부터 들을 수가 있었다.

혼례에 앞서 사물놀이패의 흥겨운 가락이 초례청을 가득 채운다. 한바탕 잔치의 흥을 돋우는 가락이 끝나고 자리를 정돈한다. 그리고 곧이어 신랑이 입장한다. 신랑은 ‘사모’를 머리에 쓰고, ‘단령’을 입었다. 그리고 허리에 ‘각대’를 찬 다음, ‘목화’라는 신발을 신었는데, 이 차림을 사모관대라 한다. 신랑이 이같이 사모관대를 하고 초례청에 서자 곧 이어서 네 명의 건장한 가마꾼이 꽃가마를 들고 초례청 앞으로 들어온다. 머리에는 구슬로 꾸민 족두리를 쓰고, 뺨에는 연지 찍고 이마에는 곤지 찍은 고운 모습의 신부가 조신하게 가마에서 내리는 데, 그 자태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그런 신부를 바라보는 신랑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려있다.

행 전안례(行/奠雁禮)라 하여 신랑이 신부와 원앙같이 살겠음을 다짐하며 기러기를 드리는 순서를 시작으로 전통혼례예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가 맞절로 인사하는 행 교배례 (行/交拜禮)가 있은 뒤 신랑 신부가 천지신명에게 행복한 부부가 될 것을 서약하는 의식, 행 교수례(行/交酬禮)가 이어진다. 불을 밝히는 점촉(點燭)순서를 거쳐 신랑신부 일어나서 서로 마주보고 맞절함으로써 전통혼례예식은 끝이 났다.

비록 혼인예식에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앞으로 부부(夫婦)가 되어 함께 살아갈 인생의 시간은 길고 긴 시간이 되리라. 예부터 혼인을 가리켜 인륜(人倫)의 시초라 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얼음이 녹으면 농상(農桑)이 시작되고 혼례를 치르면 사람의 일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혼인을 인륜지 대사요, 탄생의 근본이라 일컫는 모양이다.

초례청을 나서니 청사초롱이 곳곳마다 걸려있다. 양(陽)을 상징하는 홍색과 음(陰)을 상징하는 청색의 청사초롱들이 초례청 입구 앞마당 초록 빚깔 잔디의 원색과 만나, 색감이 가져다주는 독특한 조화를 이루며, 오늘 전통혼례예식을 통해 평생 부부의 연(緣)으로 맺어진 새신랑 새신부의 앞날을 두 손 가지런히 모아 축복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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