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개체의 본질-bird(이서윤作) - 본래 자신의 모습, 본질은 무엇일까. 환경적 요인에 의해 휘둘리면서 점차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 본질적 자아를 찾기 위해 근원을 좇아간다.

순식간에 비워지는 기억으로 살아도
엄마는 자식사랑을 부여잡고 버틴다
그 기억만은 은행나무 노란 등불처럼
선명하다고 믿는다
엄마 부디 우리 걱정 마시고
내일 아침 식사 많이 하셔야 돼요

은행나무가 지상에 노란 등잔불을 내 걸었다. 길 위의 정이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 양초에 등잔불을 붙여 들고 간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어도 내 마음 등잔불이 꺼지지 않는다. 은행나무 아래 황금빛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엄마 생각이 늦도록 켜져 있다.

엄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지팡이가 없으면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없는 엄마는 뇌동맥 7년차. 그래도 여생이 넘어질 수 없는 이유는 걱정 때문이다.

올 여름, 황금빛 지팡이 두 개를 샀다. 양쪽 다리가 성하지 못하니 지팡이도 두 개가 필요했다. 무더위 쉼터인 마을 노인정에 엄마가 계셨다. 자랑스럽게 지팡이가 든 박스를 뜯는데, 어느 분이 그러신다. 지팡이는 자식이 사주는 것이 아니라고, 그건 오히려 부모의 다리가 낫지 않기를 바라는 불효자의 마음이라고.

엄마가 급히 지팡이 하나 값에 오천 원을 쳐주겠다며 만 원을 주셨다. 받아야만 자식이 사준 꼴 나지 않는다는 소리에 덥석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상을 차리는데 엄마한테 연이어 세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처음 전화는 누가 지팡이 두 개를 집에 두고 갔는데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씀이었고, 다음 전화는 마을 회관에 지팡이 장수가 왔길래 지팡이 두 개를 샀다는 말씀, 마지막 전화는 주머니에 있던 돈 만 원이 없어졌다는 말씀이었다.

충격이었다. 고작 2시간 전의 일인데도 엄마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셨다. 일부러 깊은 한숨 소리를 전화기 너머 들려드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이를 나무라듯 다그치며 어서 기억해 내라고 성을 내다가 엄마도 나는 결국 울먹였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엄마였다. 일제시대에 또래들이 다니지 못한 소학교를 4년이나 다니는 동안 반장까지 하셨고, 그 때 배운 일어를 지금도 제법 하신다. 젊었을 적에는 마을에서 계산하는 일이나, 글을 읽고 쓰는 일을 도맡아 해 준 덕에 박씨 성을 따서 박첨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런데 세월의 높은 파도는 엄마도 넘지 못하고, 못 쓰는 두 다리를 끌고 치매까지 앓으신다. 내가 왜 이럴꼬, 내가 왜 이럴꼬 하던 것이 급기야 몇 시간 전의 일도 잊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왔다.

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돌아온 다음 날, 왜 아버지 제삿날인데 아무도 오지 않느냐고 성화시질 않나, 손주에게 용돈을 주고 돌아서서 또 주시질 않나. 그러다 정신을 차리시면 그나마 밥 먹고 돌아서서 며느리에게 또 밥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며 웃어넘기지만 엄마의 치매는 이제 깊을 대로 깊었다.

엄마는 다 잊어버린다. 기억 속 열매를 까먹고 쭉정이만 내뱉는다. 엄마의 기억의 밥상에는 빈 그릇만 기득하다.

충격을 받은 건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멀쩡하던 분이 기억을 놓치기 시작했을 때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약을 드시게는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자식들이 번갈아 찾아가서 기억을 찾아주고 진정시키고 돌아오면 그 때뿐이다. 작년에는 다리를 다쳐 우리 집에 며칠 계셨는데 한밤중에 깨서는 밥 받아먹는 아기처럼 입을 벌리고 우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가슴을 치고 두려움에 떨었다. 70년 살았던 집이 어디에 붙었는지 생각나지 않고, 지금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어릴 적 고향집 가는 길이 자꾸만 생각난다고.

그럴 때마다 우리 형제는 엄마의 기억을 찾아주려고 애썼다.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잘 생각해 봐. 잘 좀 생각해 봐.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도 엄마는 넘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비틀거리지만 결코 맥없이 주저앉지 않는다. 순식간에 비워지는 기억으로 살아도 엄마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자식 사랑을 부여잡고 버틴다. 자식 사랑이 유별나셨던 엄마. 그 사랑이 모두 걱정으로 이어져 걱정으로 일생을 사셨다.

사실 엄마의 치매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우리 형제들은 안다. 그것은 외로움. 엄마의 건강에 너무 무심했던, 엄마의 강건함을 믿고 홀로 계시게 한 긴 시간들이 원인이었다. 타는 속을, 밤새 가슴 끓는 염려를 가볍게 응대하고, 엄마는 괜찮다는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린 자식들의 죗값을 엄마가 대신 받는 것이다.

그 후 우리 형제가 깨달은 것은 엄마의 기억을 굳이 찾아주려 애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 지금 기억하는 것이 살면서 만든 기억의 전부라고 속아 주는 것, 그리고 절대로 혼자 계시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살면서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엄마에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며, 살아갈 동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충분히 주셨다고, 그 기억만은 저 노란 등잔불처럼 선명하다고 믿는다.

엄마, 제발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기억까지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부디 우리 걱정 마시고 내일 아침 식사 많이 하셔야 해요.

▲ 정임조씨

■ 정임조씨는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4회 MBC 창작동화 대상에 장편 동화 대상 수상
·제3회 서덕출 문학상 수상
·단편 동화 <초록 대문 집에 편지가 오면> 초등학교 교과서 수록

▲ 이서윤씨

■ 이서윤씨는
·계명대 대학원 회화과 졸업, 개인전 8회
·<2017년 정유년 복을 품다> 웃는얼굴아트센터갤러리 대구
·<신작 중심 Good Morning 새아침전> 아리수갤러리 서울
·<0cm 한국·독일 아트페스타> 독일 하노버 뮬레박물관
·한국미협·울산미협 회원
·대구현대미술가협회·울산현대미술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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