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울산 병영성

▲ 병영성 항공사진

울산, 왜구 방어 목적으로 신라 초기부터 수많은 성곽 세워져
깃발이 바람타고 병영에 떨어지자 좌병영을 옮겼다는 전설도
1597년 정유재란때 울산왜성 건축위해 돌 가져가 폐허로 남아
2012년부터 문화재청·중구청이 순차적으로 정비, 지금의 모습
울산읍성 생긴뒤 군사-행정 나뉘자 ‘한 고을 두 수령’ 갈등도

尙武藝 好商賣 性剛毅 可必興文而易化
무예를 숭상하고 장사를 좋아하며, 성품이 강하고 굳세어 문치(文治)를 일으켜 쉽게 교화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2권, 경상남도, 울산군, 풍속

울산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쌓고 있어 연중 따뜻하며 울산만과 태화강을 끼고 있어 해산물이나 소금이 풍부한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사람들이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하지만 일본과 가까운 지정학적 위치로 왜구들에게 끊임없는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은 사람들을 무예를 숭상하며 성품이 강하고 굳세어지게 했다.

또한 적을 방어하기위해 신라초기부터 수많은 성곽들이 세워졌는데 대표적인 예로 중구 병영에 위치한 병영성이 있다.

병영이란 경주동면 토을마리 지금의 모화에 있던 경상좌병영이 1417년(조선태종17년) 이곳 거마곡으로 옮겨와 구한말 진위대가 해산될 때까지 군사기지였던 곳으로 정식 명칭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이다.

좌병영이 경주 토을마리 즉 기박산성에 있을 때 성을 쌓는데, 동해 쪽에서 큰 바람이 불어 깃발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남으로 날아가 지금의 병영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하여 좌병영을 울산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병영성을 찾아 가을을 벗어던진 은행나무 사이로 난 북부순환도로를 타고 울산경상좌도병영성이란 표지판을 따라 우측으로 접어들었다. 높은 구릉지를 돌로 감싸고 있는 북문지 위로 올라가니 사방으로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고 길고 넓은 성곽의 규모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벽 군데군데 꽂혀 펄럭이는 깃발들은 당시 거센 바람과 적을 온몸으로 막아야만했던 병사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 지난 10월14~15일 이틀에 걸쳐 울산시 중구 병영성 일원에서 열린 ‘병영성 축성 600주년 기념행사’.

병영성은 주산인 황방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말단부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계곡을 성안에 둔 포곡식 성으로 4개의 성문과 십자형의 가로망을 갖추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 성의 돌을 가져다 울산왜성을 쌓느라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을 2012년부터 문화재청과 중구청이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북문지, 서문지, 동문지 구간의 성벽과 주변을 순차적으로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도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발끝에서 느껴지는 폭신폭신한 잔디의 느낌은 걸음걸음 의미를 되새기기에 충분했다. 십 분쯤 걷다보니 돌계단이 나오고 산전샘이란 푯말이 있었다. 1967년까지 병영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산전샘은 400여 년 전에 자연수가 솟아올라 생긴 샘으로 물이 맑고 맛도 좋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넘쳐 현공설운동장인 정지말들까지 적실 정도로 물이 많았다고 한다.

낙엽으로 치장된 계단을 내려가니 어련당 옆에 산전샘이 있고 크지는 않지만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부터 시작했으면 더 편리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려온 김에 민가로 인해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남문지로 걸음을 옮겼다. 1987년 문화재 사적 제320호로 지정될 당시 지정범위는 서문지와 남문지 사이 일부분이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상업시설이 들어서는 등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각종 관아시설은 모두 해체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외솔 최현배 선생님 기념관이 나오고 길 건너편에 병영성의 동헌과 객사가 있었던 지금의 병영초등학교가 보였다. 울산읍성이 생기기전에는 병마절도사가 함께 보던 군사적 업무와 행정업무를 읍성이 생긴 후 각각 나누어 업무를 보게 하였다. 한 고을에 두 수령이 같이 근무하였기에 읍성과 병영성의 업무는 완전히 나누어지기 어려웠다. 게다가 품계상 종2품인 병마절도사와 종4품인 군수가 동등한 관계가 될 수도 없었다. 결국 갈등의 골이 깊어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울산읍성이 만들어진 80여년이 지난 1563년 어느 날 병영의 경상좌병마절도사 이대신이 울산군수 김현경에게 편지를 보내 도배를 부탁한다.

이 편지를 본 울산군수 김현경은 곧장 병영성으로 달려가 1555년 이후 경상감사께서 병영의 업무는 남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하라고 했다며 따지듯 말했다. 병마절도사는 품계가 낮은 군수의 오만함이 괘씸해 울산군의 아전 4명을 잡아와 곤장을 쳤다. 그리고 울산군수의 오만함을 들어 경상감사에게 죄를 알리는 계문을 보내게 된다. 한편 병영성으로 잡혀간 울산군의 아전들은 울산군수에게 울며 하소연하니 울산군수는 대사간과 장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좌병마절도사의 일에 대하여 알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무식한 무관이 문관을 능멸한다. 만약 이러한 일을 내버려 둔다면 나중에 병마절도사가 군수를 마음대로 조정하는 등 잘못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을 또 어찌 알게 되었는지 좌병마절도사는 관군을 보내어 울산군수가 보낸 편지를 빼앗아 자신이 쓴 장계와 함께 임금께 올렸다. 한술 더 떠 임금께 병마절도사라는 자신의 직책을 벗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이 일의 책임을 울산군수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명종임금께서는 “한 도를 관할하는 장수인 병마절도사의 사소한 명을 따르지 않은 울산군수와 남의 편지를 가로채 장계를 올린 병마절도사 모두 옳지 않다”하여 두 명 모두 파직시켰다.

물론 이 일은 한 단면에 불과하지만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관계, 문(文)과 무(武)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일이었다.

마을을 돌아 다시 서문 쪽 성곽에 올랐다.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성벽은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이 성벽을 통해 배우게 된다. 돌로 쌓아진 성벽은 끝이 났지만 삶이라는 알갱이로 역사라는 성벽을 단단히 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