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21)‘패션 1번가’ 학성로

▲ 1988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12차 아시아 양복 연맹총회’에서 한국대표로 참석한 홍성재(왼쪽 중앙)씨가 양복재단을 시현하고 있는 모습

일제시대, 모직 귀했고 국민복 권장
해방후에도 비싼가격에 거의 못입어
양복 한벌 가격 = 교사 5~6개월 월급
80년대 중반 울산내 양복점 360여곳
울산 최초 대규모 양복점은 ‘백합사’
지금은 기성복에 밀려 10여곳으로

울산시 중구 시계탑 사거리에서 우정동 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양복점이 많다.

시계탑 인근만 해도 모모양복점, 김도용양복점, 최병원테일러, 우일양복점, 국정사, 이상현 테일러 등 7~8군데가 넘는다. 모모양복점 앞에는 줄자를 목에 걸친 재단사의 동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유흥이 낳은 패션문화의 양복점 거리’라는 제목과 함께 이 거리에 옛날에는 양복점이 많았다는 글을 써놓고 있다.

요즘은 양복점 보다는 오히려 스마트폰 상점이 훨씬 많지만 70~80년대만 해도 이 거리에는 양복점이 많았고 이들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어 입은 멋쟁이들이 거리를 누볐다.

울산에 언제부터 양복점이 들어섰는지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다만 양복을 우리나라 사람들 보다 일본 사람들이 먼저 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울산에도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양복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중구 학성로에 서 있는 ‘패션문화 양복점 거리’ 동상.

일제강점기 구 울산초등학교 앞 학성여관 맞은편에 한국인들이 운영했던 양복점이 두 개가 있었지만 소규모였다. 이들 양복점들은 양복을 만드는 모직 자체가 귀한 시절이라 옷을 수선하는 정도였고 성업을 누리지 못했다.

더욱이 일제 말이 되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국민복을 권장해 양복을 입을 수 있는 계층인 고급 공무원들이 모두 국민복을 입는 바람에 양복점이 번창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는 양복지를 만드는 공장이 없었다. 서울의 경성방직과 부산의 조선방직이 있었지만 이들은 광목을 주로 생산했다. 해방 후에는 부산의 김지태가 조선견직을 운영했지만 이 역시 비단을 생산하다보니 국내에는 모직공장이 없어 양복지를 구하는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해방 후에도 울산에는 양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40년대 후반 울산농고 교사로 활동했던 김창식 옹(92)은 “내가 울산 농고에 있을 때 교사들이 30여명이나 되었지만 교사들 중 양복을 입은 사람은 김영칠과 나뿐이었다”고 말한다. 김 옹은 “당시만 해도 양복지가 밀무역을 통해 국내로 들어 오다보니 가격이 너무 비싸 양복 한 벌 값이 6만원이나 했다”면서 “교사 한 달 월급이 고작 1만 2000원 정도였기 때문에 교사가 양복을 입으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5~6 개월을 모아야 가능했다”고 회상한다.

울산에서는 내로라하는 부자였던 김영칠과 김 옹이 당시 입었던 양복은 소위 ‘마카오제’라고 해 마카오에서 수입한 천으로 만들었다. 김영칠은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야마사 백화점을 운영했던 최장순의 사위였고 김 옹은 당시 우정동 천석꾼 집안의 장손이었다. 김 옹의 경우 이 때만 해도 울산에는 제대로 된 양복점이 없어 부산으로 가 광복동 만우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었다.

울산에서 양복의 시대가 열린 것은 울산이 공업도시가 되면서다. 이 무렵 신흥부자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양복점이 문을 열게 되는데 초기만 해도 양복점 주인은 물론이고 재단사들도 대부분 부산에서 왔다. 6·25 때 임시수도로 인구가 급증했던 부산은 울산보다 양복 문화가 훨씬 빨리 보급되었다.

울산에서 대규모 양복점을 처음 차린 사람은 서태봉씨다. 그는 1968년 부산 현대복장사에서 일하고 있던 재단사와 봉제공을 대거 울산으로 데리고 와 지금의 성남동 보세거리에 있는 새한목욕탕 맞은편에 백합사 양복점을 열었다.

이 무렵 울산에는 미화라사와 취미양복점이 있었지만 규모 면에서 백합사를 따르지 못했다.

백합사의 경우 주인은 따로 있었지만 서태봉 재단사와 이상태 봉제공이 열심히 일해 울산에서 명성을 날렸다. 백합사는 이후 울산을 대표하는 모모양복점의 박종식과 일번가양복점의 홍성재가 합류하면서 울산을 대표하는 양복점이 되었다.

통영의 서울양복점에서 8년간 기술을 익혔던 홍씨가 백합사로 온 것은 서태봉 재단사가 통영 출신으로 홍씨를 불렀기 때문이다.

백합사를 나와 잠시 삼미사에서 일하던 중 입대했던 홍씨가 제대 후 울산으로 온 것이 1972년이었는데 그동안 울산 양복점의 판세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무렵 홍씨는 라이온즈양복점에서 잠시 일하다가 김정덕이 운영하는 로얄양복점으로 옮겼는데 이 때 강정길도 옥교동 유미 빌딩 옆에 천우양복점을 차렸다.

양복점을 운영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만 믿고 양복점을 열었던 강씨는 옷은 다른 상점에 비해 많이 만들어 팔았지만 경영을 잘못해 2년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당시 울산에는 근로자들이 많다보니 이들이 월부로 양복을 해 입었는데 제 때 돈을 주지 않아 자금 부족으로 손을 들어야 했다.

이에 비하면 홍씨가 재단사로 일했던 로얄은 양복을 많이 팔아 한동안 울산을 대표하는 양복점이 되었다. 당시 로얄을 찾은 고객으로는 고원준과 이일성이 있다.

고씨가 로얄에서 가장 많은 옷을 맞추어 입었던 때가 70년대 중반 JC 활동을 할 때다. 고씨는 이 때 거의 매달 양복을 한 벌 씩 맞추어 입었는데 항상 몸에 딱 맞게 옷을 입었다. 홍씨는 고씨의 경우 몸체가 늘씬하다보니 양복을 입으면 품위가 있어 보였다고 말한다. 그는 옷을 찾을 때면 항상 재단사들에게 팁을 듬뿍 주어 로얄의 인기 있는 고객이었다.

이일성 역시 70~80년대 야당생활을 하면서 로얄의 단골고객이 되었다. 이씨는 양복을 맞출 때면 단추는 스스로 다른 곳에서 사와 달았는데 단추를 고르는 기술이 재단사 이상으로 뛰어났다. 이씨는 특히 값비싼 양복을 맞출 때는 금단추를 본인이 직접 사와 달곤 했다.

이씨가 얼마나 양복을 아껴 입었나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울산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얘기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면 양복바지가 구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용변을 보기 전 항상 바지를 벗어 밖에 걸어 놓고 용변을 보았다고 한다. 또 회식자리에서는 음식물이 옷에 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상의를 벗어 아무데나 걸지 않고 항상 옷걸이에 걸어 놓고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홍씨에 따르면 이씨의 경우 경제적 여유가 없다보니 양복을 맞추러 올 때마다 점심은 국수를 먹으면서도 양복지는 항상 제일 좋은 것을 골랐다고 말한다.

홍씨가 로얄에서 나와 시계탑 사거리에서 가까운 옛 미진백화점 자리에 양복점을 연 것이 80년대 초다.

이 때 일번가를 가장 많이 이용했던 고객이 한국프랜즈 김영주 회장이었다. “김 회장의 경우 업무가 바쁘다보니 회장이 양복점에 오기보다는 차를 보내어 저를 회사로 부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가면 항상 저를 자신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 샘플을 챙긴 후 사무실 내에 있는 화장실에서 치수를 재었습니다.”

홍씨에 따르면 한국프랜즈의 경우 회장이 사용하는 화장실 넓이가 3~4평이나 되고 벽에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어 치수를 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고 한다.

홍씨는 김 회장의 경우 밝은 색의 정장에 깃을 세우는 특수복 형식의 옷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양복을 입은 상태에서도 일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서라고 말한다.

그동안 울산의 양복점은 숫자가 크게 줄었다. 홍씨가 한국맞춤양복협회 울산지부장을 할 때인 80년대 중반만 해도 등록 양복점이 360여개나 되었는데 이 숫자가 지금은 10여개로 줄어들었다.

홍씨가 내다보는 울산의 양복점은 전망이 결코 밝지 않다.

“소비자들은 맞춤양복이 기성복보다 비싸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지금까지 일반소비자들이 기성복에 비해 맞춤형 옷이 비싸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기성복의 경우 대량으로 옷을 만들다보니 인건비는 맞춤형에 비해 싸지만 항상 재고가 많이 나올 것에 대비해 옷값을 매기기 때문에 맞춤보다 쌀 수가 없습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러면서 홍씨는 “요즘 들어 소비자들이 기성복보다는 소재를 멋대로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체형에 맞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는 맞춤옷을 좋아하지만 그동안 맞춤 양복이 잘 팔리지 않다보니 양복점에서 전문기술자들을 양성하지 않아 당분간 맞춤옷을 싸게 입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홍씨는 “일반 기술자들의 경우 공장에 들어가 5~6개월만 일을 배우면 일선에서 일할 수 있지만 양복의 경우 제대로 된 옷을 한 벌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5~6년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이런 긴 숙련기간에 비해 임금이 싸다보니 양복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한다.

30여년의 성남동 시대를 접고 2014년 남구의 웨딩거리로 상점을 옮긴 홍씨는 양복에 손을 댄지 57년만인 올해 (사)한국맞춤양복협회가 주는 장인상을 받았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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