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로 30년…교육자로 20여년…
(3) 김장배 동신학원 울산제일고등학교 설립자

▲ 김장배 제일고등학교 설립자는 인생 최고의 결정에 제일고등학교 설립을 들었다. 아래 사진은 설립자가 직접 작성한 창학이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

형편 어려웠지만 아버지 교육열 덕에
약대 졸업했고 다섯평 약국으로 시작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보람된 일 원해
제일고등학교 설립, 인생 최고의 결정
2010년 8월 교육위원 임기 마친 다음
칼날 위 걷는 마음으로 7년 문학공부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작가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70세까지 살기를 바라는 노인의 삶이 아닌 100세 시대에 맞춰 세월을 거스르고 도전하는 ‘제 2의 삶’을 살고 있는 슈퍼노인이 떠오르고 있다. 70이 넘어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꽃청춘’보다 멋있는 ‘노년의 청춘’을 열어간다. 김장배 울산제일고등학교 설립자의 삶이 주목받고 있다. 약사로 30년, 울산제일고등학교 설립 후 인재양성과 교육위원으로 20여년의 시간을 쏟아붓고는 78세의 나이에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조집 <과녁>을 내고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지난 6년여간 매일 8시간씩 책을 읽고 글을 쓴 결과다. 3년안에 시조집 2권을 내겠다는 목표도 정했다. “목표를 향해 다가가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으면 과녁에 정확히 명중한다는 믿음이 힘이 되었다”며 남은 절반의 목표를 향해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약사에서 교육자로, 그리고 작가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는 그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보나.

“약국은 약 30년간 운영했다. 접은 지는 20년이 넘었다. 제일고등학교를 설립한지도 강산이 세 번 변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교육위원은 네 차례 했다. 2010년 8월 교육위원 임기를 마친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한 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설립자로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없는 약점 아닌 약점도 작용했다. 칼날 위를 걷는 마음으로 바르게 살아가야할 처지로, 글을 쓰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시조를 쓴다는 것은 언어를 조탁하는 일인데 그것이 바로 수신과 같지 않을까.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있는 강의를 5년6개월 수강했다. 부경대학교 평생교육원의 수필 강의도 1년 수강했다.”

-시조시인이 된 과정과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처음엔 수필공부를 했다. 비교적 쉬울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수필공부는 웃고 들어가서 울고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제가 쓴 글이 딱딱해서 부드럽게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시 공부도 함께 했다. 그러던 중 울산문인협회의 문학 강좌에서 시조 강의를 들었다. 느낌이 왔다. 시조는 단수 한 편을 쓰려면 마흔다섯 자 내외를 쓰면 되고, 세수짜리 연시조를 써도 150자 이내면 되지만 수필은 보통 3000자 안팎으로 쓰게 된다. 박영식 선생과 민병도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시조 공부를 했다. 7년의 문학공부중 시조에 3년을 바쳤다. 그러다가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이 등단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수필과 시조로 신춘문예에 응모를 했다.”

-제일고등학교를 설립, 오랜 시간 인재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어떻게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나.

“울산시민들의 도움으로 약국 경영이 잘됐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학교가 모자라 울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 2000명 이상이 경주 등 외지로 가야하거나 아예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많았다. 일부라도 울산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해야겠다 싶었다. 세상에 태어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인재를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지금 여러 사립학교의 경우 설립자의 후손들에게는 애물단지로 여겨지고 있다. 설립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매년 일정 금액을 학교에 기부하지만 후손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저는 가족들에게 언제라도 힘들면 국가에 기증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사학재단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텐데.

“원칙을 중요시해 온 나로서는 두 가지가 떠 오른다. 첫번째가 교사 채용 청탁이다. 학생교육에 제일 비중이 큰 것이 교사다. 한번 임용하면 정년 때까지 근무하게 되기에 교사채용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흔히들 힘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청탁을 해왔다. 한 건도 들어주지 않았다. 꽤 피곤했다. 두번째는 우수한 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평준화지역이 아니었기에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기숙사도 지었다. 성적이 일정한 상위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은 3년간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무료로 했다. 서울대에 입학하는 학생에게는 입학·등록금을 4년간 사비로 지원했다.”

-중점을 두고 있는 교육은 무엇인지 또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또 세계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인재 육성에도 힘써야 한다. 양질의 교육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4차 산업시대에 걸맞는 창의력 교육에 중점을 둬야 하고, 문화예술 시대를 열어갈 정서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또 체육교육도 늘려서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정신과 몸이 튼튼한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이 절실했다. 교육감의 역할이 중요했고, 제대로 된 교육감을 뽑고 싶어서 교육위원으로 나섰다.”

-약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꿈을 이룬 것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부모님의 헌신이 있었다. 어린시절, 아버지는 창호지에 미리 써 두었던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붓글씨도 연습하도록 했다. 가끔 육필 필사본인 의열사약전(義烈士略傳)을 보여줬다. 안중근, 유관순, 김상옥, 윤봉길 등 열다섯 분의 의사·열사에 대한 이력이 실려 있었는데, 당시의 어린 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모은 돈으로 운반선을 한 척 샀다. 부산에서 묵호로 짐을 싣고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좌초당했다. 아버지와 선원들은 배를 버리고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전 재산이 사라졌다.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아들 셋 모두 대학을 다니게 했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교사가 제격이라 생각했지만 사범학교 입학시험 낙방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약사나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수업료가 많이 드는 의대 대신 약대를 선택했다. 아르바이트하며 어렵게 학교를 마치게 되었지만 무일푼의 청년에게 은행 문턱은 높았다. 확실한 담보를 요구했고 그 조건을 채울 수 없어서 사채를 얻어 어렵사리 다섯 평 정도의 점포를 얻었다.”

-일을 대하는 평소의 지론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일, 가장 명예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지.

“해야 할 것이라고 마음먹으면, 그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서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제일고등학교 설립도 그 같은 결과다.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 2006년 3월에 제13차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는데, 대한적십자사를 대표해서 단장으로 다녀온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태철 경상일보 논설위원

▲ 김장배 동신학원 울산제일고등학교 설립자

김장배 동신학원 울산제일고등학교 설립자는

1939년 울산 출생. 약학·철학박사. 울산광역시 교육위원회 의장 4회 역임. 제13차 이산가족 상봉 단장. 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2015년). 제6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은상(2015년) 수상. 201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저서 <건강생활의 지혜> 및 논문 다수. 현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사)국제시조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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