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22)구와바라 다끼 여사

▲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울주군 삼남면 진장마을에 있었던 다끼 여사의 농장 건물. 다끼 여사는 이 농장에서 누에를 키워 번 돈을 언양중학교 건립에 내어놓는 등 언양의 교육발전에 기여했다. 사진 속 건물은 2000년대 이 곳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다끼 여사, 일제강점기 남편 구와바라가 울산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주
해방전 남편이 다른여자와 살림차리자 삼남면 진장마을서 누에 키우며 생활
이후 남편 유산과 자신이 잠업으로 번 돈으로 언양 발전에 지대한 영향 끼쳐
농림전수학교 이전과 언양중 전신 울산공립농업보습학교 건립에 재산 희사

구와바라 다끼 여사는 구소 이호경, 이효정과 함께 울산근대사에 가장 영향을 끼친 여성중 한 명이다.

구소는 해방 후 문학 활동을 했던 시인으로 울산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중앙문단에 등단했다. 추전 김홍조의 소실로 살다가 추전이 서거한 후 멀리 거창으로 재가했던 구소는 나중에 한시집 <봉선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효정은 일제강점기 동구 보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중 당시 항일운동을 했던 박두복과 결혼했다. 그러나 해방 후 박씨가 좌익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후 나중에 간첩으로 동구에 잠입하는 바람에 자식들과 함께 기구한 일생을 살아야 했던 여인이다.

이들이 한국인들인데 반해 구와바라 다끼는 일본 여인으로 언양에 살면서 언양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다끼 여사는 비록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울산교육사에 끼친 영향이 자못 크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가 외국인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행적은 울산교육사에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 다끼 여사는 해방 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언양에서 많은 사회활동을 벌였지만 지금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언양에 많지 않다.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인 다끼 여사가 울산으로 온 것은 일제강점기 남편 구와바라가 울산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이다. 가고시마는 하기(萩)시와 함께 명치유신의 발상지다. 구와바라가 언제 울산에 와 경찰 서장으로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대암댐에 묻힌 축선사를 연구하다 보면 그의 이름이 나온다. 축선사는 신라시대 건립된 고찰이다. 그런데 1929년 당시 축선사 인근 마을에 살았던 신진췌씨가 축선사 탑 부근에 있었던 황무지를 개간하던 중 석곽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 오색찬연한 곡옥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았던 울산경찰서 삼동 주재소는 이를 울산경찰서에 알렸고 이 때 이 보물을 탐내었던 구와바라가 신씨를 문화재 도굴 혐의로 구속시켰다. 이 때문에 신씨는 울산경찰서에 연행되어 구류까지 살아야 했다. 신씨가 찾아내었던 곡옥이 구와바라 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물론이다. 신진췌씨는 언양에 살고 있는 시조 시인 신동익씨의 부친이다.

구와바라는 해방 전 울산에서 경찰 옷을 벗은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언양에서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살았다. 당시 언양 인근에는 그의 전답이 많았다.

이때 이미 구와바라는 다른 한국여자와 생활했기 때문에 부인 다끼 여사는 남편과 함께 살지 않고 삼남면 진장마을에서 누에를 키우면서 따로 생활했다. 그런데 구와바라가 해방 전 중풍으로 타계하자 그가 남긴 많은 재산이 다끼 여사의 소유가 되었다.

다끼 여사는 이 때 이 재산을 언양의 교육발전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가진 후 곧 해방이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산소가 있는 언양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언양 사람들을 많이 고용해 누에를 키웠다.

해방 후 그녀가 일본으로 가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삼남면 가천에 있었던 농림전수학교를 떠나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끼 여사는 농림전수학교가 울산에서 언양으로 옮겨 올 때 많은 재산을 이 학교에 희사했다.

다끼 여사가 농림전수학교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나 하는 것은 일본에 있었던 그녀의 친정 조카를 언양으로 데리고 와 이 학교 교사로 활동하도록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천에 있었던 농림전수학교는 해방과 함께 언양의 어음리로 옮겨오게 된다.

이 때 다끼 여사는 학교가 언양으로 옮겨 가는 것을 싫어했다. 따라서 언양 유지들이 다끼 여사 집으로 몰려가 그녀를 설득했고 결국 농림전수학교가 언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해방 직전 농림전수학교 학생으로 학교 실습시간에 다끼 농장을 자주 드나들었던 최석윤(88·어음리 거주)씨는 “다끼 여사는 진장에서 누에를 키워 번 많은 돈을 농림전수학교 이전과 언양중학교 건립에 내는 등 언양의 교육발전을 위해 남긴 발자취가 큰데도 그에 대한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잊혀져 가는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다끼 여사가 누에를 키웠던 집은 삼남면 진장 언덕에 있었다. 집은 일자형 건물이었지만 건물이 길어 방이 많았다. 이 집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뽕나무가 많았다. 지금은 이 집이 있었던 곳에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다끼 여사는 집에서 키운 누에를 모두 언양공판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 때 받은 돈의 액수가 언양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녀는 이 돈 중 인건비와 관리비를 공판장에 준 후 나머지 돈으로 언양 노인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그녀가 누에를 키워 번 돈을 유용하게 썼던 때가 해방 3년 후 1948년 언양에 중학교가 세워질 때이다. 언양중학교는 1926년 4월에 울산에 세워졌던 울산공립농업보습학교가 전신이다. 울산공립농업보습학교는 지금 학성 아파트가 있는 울산 중구 학성동에 2년제로 세워졌는데 1933년 폐교와 함께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로 옮겨간다.

지금의 삼남면 가천리 강당 자리로 온 이 학교는 교명도 울산공립농림전수학교로 개칭했다. 2년제로 수업을 시작했던 이 학교에는 임과·축산과·원예과가 있었다. 이 학교는 이후 10여년이 지난 뒤 다시 언양 어음리로 오게 되었다. 강당에는 20여년 전만해도 학교정문과 일제강점기 스기하라 일본 교장이 사택으로 사용했던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학교가 어음리로 옮겨 질 때도 다끼 여사는 현 학교 부지와 자신이 정성들여 개간했던 진장의 뽕밭을 학교 재산으로 내어 놓았는데 나중에 언양중학교는 이 밭을 학생들의 실습지로 사용했다.

해방 후 농지개혁은 그동안 많은 농지를 가져 부자로 살았던 다끼 여사를 어렵게 했다. 농지개혁 후에는 다끼 여사가 숙식을 해결 할 집마저 없어 언양중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다는 얘기가 있나 하면 학교 부근에서 가난하게 살았다는 얘기도 전해 오고 있다.

이 무렵 다끼 여사는 언양중학교를 찾아와 자신이 상북면 명촌 마을에서 따온 녹차를 교사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명촌 마을에는 지금도 녹차 밭이 있다. 그는 학교에서 당시 교무주임이었던 이백수씨를 만나곤 했는데 이 주임은 그녀가 올 때마다 쌀을 조금씩 주었고 다끼 여사는 이 쌀로 끼니를 이어가곤 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언양중학교 교사들이 녹차를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를 잘 몰라 다끼 여사가 주고 간 녹차를 난로 위에 물을 붓고 끓인 후 당원을 넣어 마셨다고 한다.

다끼 여사는 1950년대 중반 타계했다. 말년의 그녀는 문장수 교장 집에서 지냈으며 한동안 몸이 아파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언양중학교가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언양중학교 동창회는 이런 그의 유지를 받들어 장례식을 학교장으로 치른 후 다끼 여사가 학교 실습지로 내어 놓았던 진장 언덕에 묻었다. 당시만 해도 언양읍에는 큰 건물이 들어서지 않아 이곳에서 보면 언양중학교가 잘 보였다. 그런데 산소가 있던 이곳에 1970년대 중반 경부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언양중학교 동창회는 다끼 여사의 무덤을 정리해 유골을 화장 한 후 상북면에 있는 보헌사에 다시 모셨다.

다끼 여사가 땅을 희사했던 언양중학교는 오래 전 대송리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이곳에 언양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그런데 대송리로 이전한 언양중학교에는 다끼 여사의 흔적은 물론이고 그녀를 아는 교사가 없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런 현상은 옛 언양중학교가 있었던 언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정을 돌아보니 정문입구 왼쪽에 언양중고등학교 사적비가 있어 혹시 이 비석에 다끼 여사의 흔적이 있나하고 보았으나 이곳에도 기록이 없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이 1962년으로 다끼 여사가 사망한지 1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비에는 학교 건립을 위해 돈을 희사한 사람들의 명단이 많이 새겨져 있지만 다끼 여사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언양에서 이제 다끼 여사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본인으로 척박한 언양땅에 교육의 씨를 뿌렸던 다끼 여사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사람이 돈을 벌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우리들에게 교훈으로 남긴 인물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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