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 전 국립합창단 예술감독·합창지휘박사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어느 나라를 여행해도 거리마다 교통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있다. 차도 사람도 신호등에 따라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한다. 누군가 그 약속과 규칙을 어기면 대형사고가 난다. 차라리 그 순간에 빨간불을 믿지 않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살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도 많이 발생한다.

지난 주 하노이에서 며칠 지내면서 교통 신호등이 없는 도시를 경험했다. 하노이 시내에서 꽤 크고 긴 길(왕복 4~6차로), 수많은 차가 밀려오고 차 보다 더 많은 오토바이가 달리는 도로에도 신호등이 없었다. 처음엔 길을 건너려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던 필자도 그 일원이 되어 도로를 건너다녔다. 차가 서거나 끊기기를 기다려 봤지만 그 많은 차와 오토바이가 동시에 멈추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옆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서서히 건너기 시작했다. 차와 오토바이는 멈추거나 경적을 울리지 않고 가던 길을 가며 그저 요리조리 사람을 피할 뿐이었다.

처음 한 두번은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점점 두려움 없이, 사고 없이 자연스럽게 길을 건너 다니게 되자 상당히 편리하게 생각됐다. ‘겁난다고 무작정 멈추지말고 더구나 후퇴하지 말고 상황을 주시하며 서서히 전진한다’는 하노이 길 건너기의 원칙만 지킨다면 말이다. 차와 오토바이도 사람을 잘 피해서 가기 때문에 그 방법이 더 안전하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역주행하는 오토바이까지 흔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접촉사고 한번 못봤다. 걷는 사람이나 차·오토바이 운전자들이 모두 거의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혼돈 속에서도 남을 배려하며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웬만한 일은 참아주며 기다리는 보행자와 운전자들이 마치 무대 위에서 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 같았다. 물론 이 거리를 지나가면 다른 곳은 정상적인 신호등을 설치해 놓고 신호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두 거리를 비교하면 신호등 없는 곳이 훨씬 매연도 덜하고 에너지와 시간도 절약될 것으로 여겨졌다. 서로서로 상대방을 살피며 사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그 거리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구천 전 국립합창단 예술감독·합창지휘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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