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신흥사와 기박산성

▲ 신흥사 대웅전(오른쪽)과 응진전.

모화리 삼태봉 둘러싼 기박산성
임란때 울산 의병들의 혼 서려있어
정확한 안내판 하나 없는것 아쉬워
기백이재 동쪽 1.7㎞ 아래 신흥사
임란때 기박산성 의병진에 합류하고
절 양식 군량미로 보탠 호국사찰

울산에 신흥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박산성은 더욱 그렇다. 서로 가까이 있는 이 두 곳은 임진, 정유 양란 때 의병과 승병 활동의 거점이었다. 소중한 역사현장이 우리들 기억 밖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구국의 성지를 찾았다. 초겨울 산 위에 부는 칼바람은 대수가 되지 못했다.

매곡산업단지입구 사거리에서 북동쪽으로 5분쯤 자동차로 오르니 오른쪽으로 신흥사 가는 길이 나타났다. 길 왼편을 보니, ‘기령소공원’이란 팻말과 함께 한자로 旗嶺(기령)이라고 새긴 육중한 바윗돌이 맞아준다. 빗돌 옆 ‘기박산성 의병제’란 안내판을 보니 이곳 지명은 ‘기백이재’로 기박산성에서 유래되었다고 되어 있다. 기백이재란 정겨운 말이 기령이란 한자어에 밀려날까 걱정이다.

기령소공원에서 400m 쯤 직진하면 왼편으로 난 길이 기박산성 들머리다. 산길은 시멘트 바닥처럼 단단하고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인기 있는 등산로인 모양이다. 심심찮게 마주치는 등산객 중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에게 물었더니 삼태봉(모화리 원원사 뒷산, 해발 629m)에 갔다 오는 길이란다.

▲ 기박산성 일부.

삼태봉 남쪽 584봉을 머리띠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길이 약 1.8㎞인 성을 울산사람들은 기박산성이라고 한다. 시대에 따라 함월산성, 신흥산성 등으로 부르기도 했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점성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학계에서는 신대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은 울산과 경주지역에 걸쳐 있으며, 통일신라 때 왜적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10분쯤 걸었을까 성의 남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성벽 모습과 돌무더기가 성문 출입구 양쪽에 나타났다. 성문 앞 ‘관문성’ 안내판에 소재지가 ‘경상북도 양남면 신대리 외’로 되어 있다. 기박산성이란 표지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어서 당황스럽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치술령과 모화리 동편 산 사이 길이 12㎞인 장성과 이 성을 합해서 관문성이라고 한다는 설명이다. 여기뿐 아니고 외동읍 녹동리와 모화리에도 똑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천곡동과 달천동 일대에 있는 울산에 속한 관문성 안내판에는 장성만을 관문성이라고 적고 있다. 같은 문화재를 두고 관할 지자체에 따라 설명이 다른 점이 아이러니하다.

▲ 기령 표지석.

기박산성의 축조시기가 확실하지 않고 관문성과 연결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에 별개의 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관문성과 기박산성 사이에 험한 골짜기와 벼랑이 있어서 굳이 연결할 필요가 없으므로 두 성을 하나의 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답답함을 풀고자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니 사적 48호인 관문성은 12㎞의 장성만 해당되는 것 같다.

씁쓸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성의 서편을 돌아 북쪽에 이르니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성벽의 모양이 너무 예쁘다.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 가지들 사이로 성벽과 돌무더기를 뚜렷이 볼 수 있어서 겨울에 성을 찾은 것이 행운이다.

산봉우리에 올라서니 400여 년 전 임진년 4월23일 그날의 함성이 환청으로 들린다. 제대로 된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왜군에게 순식간에 부산과 울산을 빼앗기자 비분강개한 울산의 의병들이 기박산성에 결집한 날이 이날이다. 이 후 경주지방 의병과 신흥사 승병들이 합류해서 세력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병영성 탈환을 위해 기습전을 펴거나 울산, 언양의 여러 요새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경주읍성 탈환 전투에도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의병들은 정유재란 때 울산 왜성(도산성) 전투에도 힘을 보탰다.

성벽의 돌 하나하나와 돌 틈마다 배어 있는 이들의 충절을 가슴에 안고 하산하는 길에 루지전망대 맞은편 도로가에서 기박산성 안내판을 발견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뿐더러 낡아서 글자도 식별되지 않으니 안타깝다.

기백이재에서 가파른 시멘트 길을 타고 구불구불 동쪽으로 1.7 ㎞ 내려가 신흥사에 닿았다. 신흥사는 선덕여왕 4년(635)에 창건된 건흥사에서 비롯된다.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경주에 사천왕사를 지은 명랑법사가 여기에 호국 도량을 세운 것이다. 절의 기록에 의하면 678년에 승병 100여명이 이 곳에서 무술을 닦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지운스님이 승병 100명을 이끌고 기박산성 의병진에 합류하고 절의 양식 300여석을 군량미로 보태는 등 호국 사찰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건흥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으며, 1646년에 병마절도사 이급이 절을 다시 세워 신흥사라고 했다. 이 후에도 화재 등으로 멸실되어 개축이 되곤 했는데 응진전이 가장 오래된 건물로 남아있다. 1998년 대웅전을 신축하면서 옛 대웅전은 응진전이란 새 이름을 얻어 대웅전 동편에 옮겨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응진전은 팔작지붕에 익공 양식으로 공포를 짜 올린 간결한 구조를 보인다. 내부 천정의 화려한 단청반자는 18세기 중반 작품으로 희소성과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금년 초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 이선옥 수필가·전 울주명지초등 교장

신흥사에는 남다른 추억이 쟁여있다. 중학생 때 친구들과 대웅전(현 응진전)에 몰려가서 부처님 앞으로 발을 내밀고 조르르 누워 밤을 지낸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여년이 훌쩍 지나갔다. 신흥사 보살님인 친구 할머니가 철없는 소녀들에게 추억거리를 안겨준 것이었다. 학교 소풍을 오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원족이었다. 평생지기와는 데이트 겸 산행도 했다. 걸어서 멀고 험한 산길을 힘들게 오갔지만 그 시절이 그립다. 20년 전 쯤에는 승용차로 온 적이 있다. 그 때 절을 관람하고 동대산 쪽의 임도로 암자를 찾아 나섰는데, 암자는 못 찾고 험한 경사로를 오르지 못해 차를 견인해야만 했던 낭패스런 일도 생각난다.

절 앞 감나무에 가지가 휘도록 주저리주저리 매달린 붉디붉은 감이 파란 하늘을 곱게 수놓고 있다. 딸 사람도 없고 딸 필요도 없는가 보다. 아스라한 추억의 편린들을 주워 담으며 동쪽 골짝 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갔다. 정자 해변의 카페에서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오늘 여정을 뒤돌아본다.

무엇보다도 기박산성이 제 이름 하나 번듯이 달았으면 좋겠다. 기령소공원의 안내판 내용 중 기박산성 위치와 해마다 열리는 의병추모제 장소도 고치고 이정표를 잘 갖추면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패러다임이 해가 다르게 바뀌고 살기가 팍팍해졌다 하더라도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 본받아야 나라가 튼튼해 질 것이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