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체력·정신력 쓸수록 고갈
업무량과 성과는 비례하지 않아
기업·개인 ‘워라밸’ 잘 맞춰야

▲ 울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실용음악도

줄인 말이 대유행이다. 요즘의 중·노년층은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줄인 말들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젊은이들조차도 현재 ‘초딩’(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줄인 말을 모른다고 초조해한다. 2017년 현재, 젊은이들 사이에 제법 자주 사용되는 줄인 말 중에 ‘워라밸’이란 단어가 있다. ‘워라밸’이란 영어문구 Work and Life Balance의 단어 첫 글자들을 따서 만든 말이다. 일과 인생의 조화라고 해석하면 될 성 싶다. 예를 들어, 워라밸이 좋은 회사란 일도 일이지만 ‘칼퇴’를 지키며, 사원들의 의욕증진을 위한 즐거운 이벤트도 많은 소위 출근할 맛이 나는 회사를 뜻하고, 워라밸이 나쁜 회사란 죽어라 일만 시키는 회사를 뜻한다.

꼭 일 년 전인 2016년 12월, 모(某) 취업포탈이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바람직한 연봉과 야근’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65%의 응답자가 중간연봉에 야근이 적은 기업을, 23%가 연봉은 적더라도 야근이 적은 기업을 선호했고, 야근은 잦더라도 연봉이 높은 기업을 택한 사람은 12%에 그쳤단다.

취미활동이나 개인시간을 연봉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얘기다. 10년 전 만해도 상상하기 힘든 결과다. 매일 오전 6시30분에 조찬회의를 하고,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했던 기성세대가 보기엔 참으로 배부른 소리요, 요즘 취업문이 좁다는 말도 워라밸이 좋은 회사만 찾다보니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월라밸과 성과의 상관관계는 과연 어떨까. 워라밸이 좋으면 성과는 나빠지고, 워라밸이 나쁘면 성과가 좋아지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 옛날 유학시절의 이야기이다. 연구실에 12명의 대학원생이 있었다. 그중 반 정도는 대충 오전 7시에 등교하여 오후 11시에 하교하며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쎄일파(쎄븐일레븐파)’, 소위 최악의 워라밸그룹이었고, 또 반 정도는 오전 11시쯤 등교하고 오후 7시쯤 하교하는 ‘일쎄파(일레븐쎄븐파)’, 즉 최상의 워라밸그룹이었다.

실험보다 이론연구가 중심인 연구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책상에 오래 붙어 앉아있을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아무튼 ‘일쎄파’는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만끽하면서 학위논문 못쓰면 그만두면 되지 하는 느긋한 모습이었다. ‘쎄일파’였던 나는 ‘일쎄파’가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결과는? 과연 ‘쎄일파’의 성과는 ‘일쎄파’의 두 배였을까? 예상한대로 ‘쎄일파’는 단시간에 양질의 논문을 다량 생산했고 ‘일쎄파’는 겨우 논문 쓰고 학위를 취득하는데 급급했다. 이후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대학교수나 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그런데…. 몇 십 년에 걸쳐 살펴보니,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쎄일파’는 연구력과 체력은 물론 인간의 매력도 대체로 하강했고, 반대로 ‘일쎄파’는 연구력이 천천히 꾸준히 성장함을 알 수 있었다. 직장과 친구사이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환영받고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일쎄파’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하루 8시간 공부한 사람들이 16시간 공부한 사람들을 여러 면에서 압도한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 체력, 정신력도 집중해서 쓰면 빨리 고갈되듯이 공부 오래하고 일 많이 하면 성과도 이에 비례하여 커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중·고교 때 펄펄 날던 운동선수가 성인이 되면 기를 못 쓰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일찍이 너무 많이 써서 체력과 기능이 소실된 때문이다.

사실상 이와 비슷한 경우는 운동선수 뿐 아니라, 연구자, 예술가, 기업가 등 모든 인간, 직업부문에서 발견된다. 이제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도 노동기반에서 지식기반으로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고, 기업분위기도 하드워킹에서 스마트워킹으로 바뀌고 있으며, 요구되는 덕성도 근면성실보다 창의력과 소통능력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학교도, 기업도, 가정도, 개인도 모두 워라밸이 좋아져야 할 때다. 요컨대 잘 놀아야 오랫동안 일도 잘한다는 얘기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일자리가 많아져 취업문이 활짝 열리면 뭐하나. 워라밸이 좋아야지.

울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실용음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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