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달천철장과 구충당 이의립 선생

▲ 달천광산의 채광흔적.

세종때 이후로 생산 끊긴 달천철장
200년 뒤 이의립 선생에 의해 재발견
울산, 영남 최대의 철 생산지이자
철 제련의 첨단기술 산업단지로 거듭
현종, 선생 충의정신에 치하문 내려

2013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그 해 학생들이 가장 많이 대여한 책이 한 권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교수이자 퓰리처상의 수상자인 세계적인 석학 재레드 다이아몬드교수가 쓴 <총.균.쇠>라는 책이다. 내용인즉 인류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총이오, 다른 하나는 균이며,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쇠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도서이다. 책에 서술된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그 가운데 쇠와 금속 즉 철이 인류의 문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라는 담론 앞에서 한 가지의 화두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울산과 철의 운명적 만남이라 할 수 있다.

▲ 울산시 북구의 고대원형로 복원실험 장면.

한편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나, 아니었나 하는 논쟁과 함께 철갑선에 갑판을 모두 철로 덮을 수 있었나, 없었나 하는 논쟁 또한 심심찮게 일어난다. 하지만 그런 논쟁을 차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그 시기에는 조선에 철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을 여러 사료(使料)에 나타난 정황으로 미루어 추정이 가능하다. 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런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곧이어 병자호란(1636)이 발발해서 나라는 또 한 번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후 국방의 중요성을, 체득(體得)을 통해 절감한 효종(1649~1659)은 1649년에 즉위하자말자 북벌계획을 추진하며 군비를 강화하는 정책을 편다. 그리하여 온 나라가 무기 생산에 진력하게 되는데, 문제는 무기의 제조 원료인 유황과 철의 부족에 있었다. 그런데 그 중차대한 시기에 유황을 발견해 내고 철을 생산해 낸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울산 출신의 구충당(구忠堂) 이의립(1621~1694) 선생이었다.

▲ 울산쇠부리축제 대장간 체험부스.

이의립 선생은 울산 전읍이 고향으로 인조 8년, 선생의 나이 불과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 어린나이에도 모친의 장례를 치르는 데 있어 예법에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의 나이 21세 때 부친이 돌아가자 주자의 가례로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때도 선생은 상복을 벗을 때까지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탈상(脫喪)을 끝낸 선생은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효도를 못하면 어찌 자식이라 하겠으며, 백성으로 태어나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정성도 없이 어찌 신하라 하겠는가’라 탄식하며 어버이 섬기는 마음으로 나라를 섬기는 일이 자신에게 맡겨진 책무라 여기게 된다. 곧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유교적 가르침을 행(行)과 동(動)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 울산북구청 광장에 세워진 구충당 이의립 동상.

하지만 선생은 ‘나라를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정작 재주가 있는 것이 없고, 뛰어난 무예 또한 없으니 무엇으로 섬기겠는가’라고 하며 자탄한다. 또한 나라를 위함에 있어서 군사와 농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조총을 구한들 화약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데, 그 화약은 유황 아니면 만들 수가 없고,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를 만듦에 있어 무쇠가 아니면 이룰 수 없다고 탄식에 탄식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국방을 지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기인데, 이 무기 또한 매 한가지로 무쇠가 없으면 이룰 수가 없음을 탄식하다가 마침내 선생은 근처 치술령에 올라가 이 두 가지를 구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칠 것을 천지신명께 맹약하고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가 인조 24년(1646)으로 선생의 나이 26세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선생은 전국의 산을 탐사하게 되는데 가까이로는 가야산부터 금강산 묘향산을 거쳐 멀리로는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안 들어가 본 골짜기가 없고 올라 보지 않은 산봉우리가 없을 만큼 유황과 철을 찾아 산천을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온갖 어려움과 고생 끝에 유황을 발견, 그 유황을 끓여 제조하는 법을 알아내게 되고 그렇게 생산된 유황을 나라에 바쳤다. 그리고 선생은 울산 달천에서 드디어 철광을 발견하고 거기서 토철을 녹여 무쇠를 생산해내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조선 전기인 세종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이 1만2500근이 수납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분명 그때까지 달천은 철의 생산지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생산이 끊기고 철장은 묻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이의립 선생에 의해 토철이 재발견된 것이다. 또한 선생에 의해 그 토철을 용해하여 백동과 철 그리고 수철(무쇠)과 생철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제련기술이 탄생하게 되면서 울산은 영남의 최대 철 생산지로 그리고 국가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는 철 제련의 첨단기술을 보유한 기술 산업단지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구충당 이의립 선생이 지녔던 유교적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충당의 유교적 충의정신은 효종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현종 임금이 구충당에게 내린 치하문에서 이를 살펴볼 수가 있다.

‘아! 임진년과 병자년을 지나 바야흐로 그 백년 뒤에 군비가 풍족해서 남쪽이 편하고 북쪽이 안정된 것을 두고 어찌 이의립의 공인 줄 모르겠는가. 이 나라 땅 수 천리에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쟁기로 논밭을 갈고 솥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편리함을 일러 이 또한 이의립의 덕인 줄 왜 모르겠는가. 이에 그 공적을 기려 패를 내리노니 자자손손 영세토록 명성을 떨치도록 할지어다’ 라고 구충당 선생을 크게 칭송하고 있다. 이에 선생은 감군은(感君恩)의 충의시를 이렇게 지었다.

임금님의 덕이 하늘과 같이 크니

온 땅의 끝에까지 높이 닿았도다

중용의 덕화 베푸니 뉘라 그 자식이 아니리

이 땅의 사는 모두가 신하다.

한편 조선시대 영남의 최대 철산지였던 달천의 쇠부리터는 2008년 유적의 일부가 발굴되면서 집터와 함께 채광유구 등이 확인된바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철광석 채광 유적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달천 철장은 그 모습을 감춘 지 이미 오래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의 철강왕은 역사를 뒤로한 채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 유촌마을 뒷산 한 곳에 한줌의 고운 흙으로 잠들어 있을 뿐이다.

▲ 홍중표 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협의회장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오늘은 참 따갑게 들린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울산 북구청이 나서 문화유산에 대한 긍지 회복을 위해 북구청 마당에 이의립 선생의 동상을 세웠고, 달천 철장에 역사공원을 조성하여 쇠부리 전시관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를 통해 하루라도 빨리 충효정신에서 비롯된 선생의 거룩한 뜻이 미래과학자를 희망하고 제2의 철강왕의 꿈을 꾸는 미래세대에게 본(本)이 되고 귀감(龜鑑)이 되는 날을 한껏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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