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24)박기태 화백과 수채화

▲ 박기태 화백은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누드와 인물화 그리고 해안풍경을 잘 그린다는 평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인물화가 유명했다. 자화상은 박 화백이 전성기인 1975년 48세 때 그린 것이다.

1927년 청량면서 태어나 경주서 그림 배워
안동중학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결혼도
1960년대 서울로 이주, 전업화가의 길 걸어
비주류 수채화로 국전서 특선도 두차례나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화단에 명성도 떨쳐
프랑스 유학후 전시회 거듭할수록 빚 늘어
80세때 포항 이주 작가활동…2013년 타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산 중구청 지하식당 입구에는 부산컨트리를 배경으로 하는 100호 정도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식당을 드나드는 중구청 직원들 중 이 그림이 울산출신으로 평생 현대미술에서 소외되었던 수채화 장르를 껴안고 독자적인 그림세계를 추구했던 박기태 화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울산 화가들 대부분은 해방 후 울산을 대표하는 화가로 이승민, 최희 그리고 박기태 화백을 든다. 이 중에서도 박 화백은 수채화 부문에서 호남의 백동진 화백과 함께 해방 후 쌍벽을 이루었다.

박 화백은 1927년 청량면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근영(根永) 옹이 태화초등학교 앞에서 한약방을 운영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

박 화백이 그림에 관심을 가진 것은 태화초등 졸업 후 1946년 경주로 가 경주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쳤던 손일봉 선생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우면서다. 당시만 해도 미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오늘날처럼 좋지 않아 미술학도들이 물감과 종이를 구하는 자체가 어려웠다. 더욱이 그 때는 대부분의 미술학도들이 유화가 전부인 것처럼 여겼던 시대라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를 한다는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화법에 관심을 가졌던 박 화백은 기름을 주재료로 하는 유화보다는 물을 재료로 하는 수채화가 우리 정서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수채화를 배웠다. 이후 박 화백은 유화보다 맑고 투명한, 그러면서도 강렬한 색상을 보여주는 수채화에 빠져 평생을 수채화에 매달렸다.

박 화백이 후학 양성을 위해 안동으로 간 때가 50년대 초반으로 이후 안동중학교에서 1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권숙자(88) 여사와 결혼한 것도 안동중학 교사로 있을 때다. 이 때 권 여사는 안동여고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안동중학 교사로 있던 1955년 울산에서 이상숙과 김태근이 문학잡지 ‘백양’을 창간했는데 이 때는 김인수 화백과 함께 삽화를 책에 그려 넣기도 했다.

안동에 사는 동안에는 부인 권 여사와 함께 울산을 자주 찾았다. 이 때 울산에서 자주 만났던 인물이 이상숙 선생과 이종수 원장이었다. 당시 이상숙 선생은 울산제일중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이 원장은 성남동에서 치과를 운영했다.

이후 영주중학을 거쳐 대구여중고에서 미술을 가르쳤던 박 화백이 서울로 간 때가 60년대 초다. 이 때 서울로 이사를 한 것은 미술에 대한 박 화백의 재질을 알았던 문중의 박관수 어른이 그에게 서울로 올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사범 학생으로 있을 때 담임을 맡았던 박씨는 당시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자유의 벗’을 창간했는데 이 책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서울로 갈 때 박 화백은 자녀가 5명이나 되어 미술교사로 살아가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따라서 서울에 도착한 박 화백은 당시 서울의 변두리였던 불광동에 셋집을 얻어 7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했다.

권 여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남편이 교사생활을 할 때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월급을 제때 가져와 가난한 중에도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지만 서울로 온 후에는 아이들이 많은데 비해 수입이 적고 일정치 않아 많은 고생을 했다”고 말한다.

더욱이 ‘자유의 벗’이 경영난으로 일 년도 되지 않아 폐간되는 바람에 그는 이상숙의 도움으로 제일생명에 입사했다. 이 회사에서 박 화백은 사보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호구지책이 되지 않아 몇 년 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화실을 차려놓고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화단에서 명성을 떨친 때가 이 무렵으로 그는 자신의 그림을 국전에 출품해 입선을 무려 10회나 했고 특선도 2회나 차지했다. 그가 특선을 할 때까지만 해도 미술계는 수채화를 유화보다 아래로 보아 수채화 화가가 특상을 받은 일이 없었다.

권 여사는 “남편이 특선을 하기 전까지는 국전에서 수채화로 특선을 한 화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해 그림에 조예가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국전 작품을 둘러보면서 남편 수채화 앞에 한창 서 있더니 심사위원들에게 ‘이렇게 훌륭한 그림이 어떻게 입선밖에 되지 않았느냐’고 의아스럽게 물어 본 후 다음 해 남편 작품이 특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무렵 우리 화단은 박 화백의 수채화에 대해 ‘금방이라도 주르르 흘러내릴 듯한 맑은 물의 기운, 거칠고 자유롭게 휘저은 짙은 색상의 붓질, 절묘한 번짐의 효과로 맛을 낸 그림’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돈이 벌리자 박 화백은 집도 녹번동으로 옮기고 화실도 마련했다. 당시 이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던 이상숙의 딸 이국희 여사는 “선생님은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그림이 적당한 여백을 두면서도 굵은 선으로 잘 처리되어 그림 공부를 하러 오는 주부들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80년대 중반에는 울산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성남동 가로수다방에서 개최된 개인전에서 많은 작품이 팔렸다. 요즘도 울산사람들 중 박 화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이것은 당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러나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화단에서 이처럼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우리 화단의 주류는 아니었다. 특히 70년대를 넘어서면서 해외에서 공부를 많이 한 화가들이 국내로 들어와 활동을 하면서 그는 이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렇게 해 그가 늦게 시작한 것이 해외 유학이었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 파리 아카데미 구량쇼미얼에서 다시 그림공부를 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그림을 많이 그리고 개인전도 여러 번 개최했다. 심지어 한국과 프랑스 작가의 공동전도 개최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빚을 졌다. 장남 규호씨는 “이 무렵 아버님은 많은 그림을 그려 적지 않은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돈을 가족들을 위해 쓰기보다는 가장 좋은 물감을 사고 그림 여행을 따나는 등 당신의 그림 공부에 모두 재투자를 하다 보니 그 피해가 가족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면서 “그 때는 아버님이 가장으로 왜 저렇게 사실까 하고 원망 아닌 원망도 했는데 그 의문이 지금에야 풀렸다”고 말한다. 규호씨는 “아버님이 가장으로서 모범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미술에 올인했던 진정한 미술가였다”고 말한다.

박 화백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때가 90년대 말 IMF가 들어 닥쳤을 때였다. 이 때 박 화백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소문이 나자 주위 작가들이 박 화백에게 개인전을 열 것을 권해 전시회를 여러 번 가졌지만 적자만 내고 말았다. 박 화백이 서울 생활을 접고 전혀 연고가 없는 포항시 장기면으로 온 것은 순전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규호씨는 “기업으로 보면 아버님은 그림은 잘 그렸지만 비즈니스를 잘 못해 부도가 난 셈입니다. 개인전을 열 때마다 돈을 벌기는커녕 매일 빚쟁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작가로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아버님을 모신 곳이 이곳 장기면”이라고 말했다.

장기면으로 올 때가 80세로 그 동안 서울에서 그린 많은 작품을 가져왔지만 빚을 갚느라고 작품 대부분을 처리해 지금은 작품이 많지 않다. 박 화백이 마지막 생을 보내었던 장기면의 집은 이층으로, 1층은 살림집이고 2층은 화실이다. 그는 이곳에 사는 동안 그림을 많이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를 찾아오는 후배들 중 그림 공부를 원하는 후배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박 화백이 타계하기 일 년 전인 2012년에는 그의 평생 친구 이상숙이 딸과 함께 이곳을 찾기도 했다. 이 여사는 “제가 아버님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선생님이 건강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는데 서울로 가 얼마 있지 않아 선생님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님이 크게 슬퍼했다”고 말한다. 이 여사는 당시 박 화백으로부터 정물화 한 점을 얻었는데 지금도 이 그림을 서울 집에 걸어 놓고 있다.

권 여사는 “남편이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 한시라도 고향 울산을 잊어 본 적이 없는데도 울산에서 활동한 시간이 많지 않아 울산사람들 중 남편을 아는 화가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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