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24)박기태 화백과 수채화
1927년 청량면서 태어나 경주서 그림 배워
안동중학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결혼도
1960년대 서울로 이주, 전업화가의 길 걸어
비주류 수채화로 국전서 특선도 두차례나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화단에 명성도 떨쳐
프랑스 유학후 전시회 거듭할수록 빚 늘어
80세때 포항 이주 작가활동…2013년 타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산 중구청 지하식당 입구에는 부산컨트리를 배경으로 하는 100호 정도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식당을 드나드는 중구청 직원들 중 이 그림이 울산출신으로 평생 현대미술에서 소외되었던 수채화 장르를 껴안고 독자적인 그림세계를 추구했던 박기태 화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울산 화가들 대부분은 해방 후 울산을 대표하는 화가로 이승민, 최희 그리고 박기태 화백을 든다. 이 중에서도 박 화백은 수채화 부문에서 호남의 백동진 화백과 함께 해방 후 쌍벽을 이루었다.
박 화백은 1927년 청량면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근영(根永) 옹이 태화초등학교 앞에서 한약방을 운영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
박 화백이 그림에 관심을 가진 것은 태화초등 졸업 후 1946년 경주로 가 경주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쳤던 손일봉 선생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우면서다. 당시만 해도 미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오늘날처럼 좋지 않아 미술학도들이 물감과 종이를 구하는 자체가 어려웠다. 더욱이 그 때는 대부분의 미술학도들이 유화가 전부인 것처럼 여겼던 시대라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를 한다는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화법에 관심을 가졌던 박 화백은 기름을 주재료로 하는 유화보다는 물을 재료로 하는 수채화가 우리 정서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수채화를 배웠다. 이후 박 화백은 유화보다 맑고 투명한, 그러면서도 강렬한 색상을 보여주는 수채화에 빠져 평생을 수채화에 매달렸다.
박 화백이 후학 양성을 위해 안동으로 간 때가 50년대 초반으로 이후 안동중학교에서 1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권숙자(88) 여사와 결혼한 것도 안동중학 교사로 있을 때다. 이 때 권 여사는 안동여고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안동중학 교사로 있던 1955년 울산에서 이상숙과 김태근이 문학잡지 ‘백양’을 창간했는데 이 때는 김인수 화백과 함께 삽화를 책에 그려 넣기도 했다.
안동에 사는 동안에는 부인 권 여사와 함께 울산을 자주 찾았다. 이 때 울산에서 자주 만났던 인물이 이상숙 선생과 이종수 원장이었다. 당시 이상숙 선생은 울산제일중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이 원장은 성남동에서 치과를 운영했다.
이후 영주중학을 거쳐 대구여중고에서 미술을 가르쳤던 박 화백이 서울로 간 때가 60년대 초다. 이 때 서울로 이사를 한 것은 미술에 대한 박 화백의 재질을 알았던 문중의 박관수 어른이 그에게 서울로 올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사범 학생으로 있을 때 담임을 맡았던 박씨는 당시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자유의 벗’을 창간했는데 이 책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서울로 갈 때 박 화백은 자녀가 5명이나 되어 미술교사로 살아가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따라서 서울에 도착한 박 화백은 당시 서울의 변두리였던 불광동에 셋집을 얻어 7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했다.
권 여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남편이 교사생활을 할 때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월급을 제때 가져와 가난한 중에도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지만 서울로 온 후에는 아이들이 많은데 비해 수입이 적고 일정치 않아 많은 고생을 했다”고 말한다.
더욱이 ‘자유의 벗’이 경영난으로 일 년도 되지 않아 폐간되는 바람에 그는 이상숙의 도움으로 제일생명에 입사했다. 이 회사에서 박 화백은 사보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호구지책이 되지 않아 몇 년 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화실을 차려놓고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화단에서 명성을 떨친 때가 이 무렵으로 그는 자신의 그림을 국전에 출품해 입선을 무려 10회나 했고 특선도 2회나 차지했다. 그가 특선을 할 때까지만 해도 미술계는 수채화를 유화보다 아래로 보아 수채화 화가가 특상을 받은 일이 없었다.
권 여사는 “남편이 특선을 하기 전까지는 국전에서 수채화로 특선을 한 화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해 그림에 조예가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국전 작품을 둘러보면서 남편 수채화 앞에 한창 서 있더니 심사위원들에게 ‘이렇게 훌륭한 그림이 어떻게 입선밖에 되지 않았느냐’고 의아스럽게 물어 본 후 다음 해 남편 작품이 특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무렵 우리 화단은 박 화백의 수채화에 대해 ‘금방이라도 주르르 흘러내릴 듯한 맑은 물의 기운, 거칠고 자유롭게 휘저은 짙은 색상의 붓질, 절묘한 번짐의 효과로 맛을 낸 그림’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돈이 벌리자 박 화백은 집도 녹번동으로 옮기고 화실도 마련했다. 당시 이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던 이상숙의 딸 이국희 여사는 “선생님은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그림이 적당한 여백을 두면서도 굵은 선으로 잘 처리되어 그림 공부를 하러 오는 주부들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80년대 중반에는 울산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성남동 가로수다방에서 개최된 개인전에서 많은 작품이 팔렸다. 요즘도 울산사람들 중 박 화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이것은 당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화단에서 이처럼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우리 화단의 주류는 아니었다. 특히 70년대를 넘어서면서 해외에서 공부를 많이 한 화가들이 국내로 들어와 활동을 하면서 그는 이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렇게 해 그가 늦게 시작한 것이 해외 유학이었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 파리 아카데미 구량쇼미얼에서 다시 그림공부를 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그림을 많이 그리고 개인전도 여러 번 개최했다. 심지어 한국과 프랑스 작가의 공동전도 개최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빚을 졌다. 장남 규호씨는 “이 무렵 아버님은 많은 그림을 그려 적지 않은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돈을 가족들을 위해 쓰기보다는 가장 좋은 물감을 사고 그림 여행을 따나는 등 당신의 그림 공부에 모두 재투자를 하다 보니 그 피해가 가족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면서 “그 때는 아버님이 가장으로 왜 저렇게 사실까 하고 원망 아닌 원망도 했는데 그 의문이 지금에야 풀렸다”고 말한다. 규호씨는 “아버님이 가장으로서 모범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미술에 올인했던 진정한 미술가였다”고 말한다.
박 화백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때가 90년대 말 IMF가 들어 닥쳤을 때였다. 이 때 박 화백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소문이 나자 주위 작가들이 박 화백에게 개인전을 열 것을 권해 전시회를 여러 번 가졌지만 적자만 내고 말았다. 박 화백이 서울 생활을 접고 전혀 연고가 없는 포항시 장기면으로 온 것은 순전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규호씨는 “기업으로 보면 아버님은 그림은 잘 그렸지만 비즈니스를 잘 못해 부도가 난 셈입니다. 개인전을 열 때마다 돈을 벌기는커녕 매일 빚쟁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작가로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아버님을 모신 곳이 이곳 장기면”이라고 말했다.
장기면으로 올 때가 80세로 그 동안 서울에서 그린 많은 작품을 가져왔지만 빚을 갚느라고 작품 대부분을 처리해 지금은 작품이 많지 않다. 박 화백이 마지막 생을 보내었던 장기면의 집은 이층으로, 1층은 살림집이고 2층은 화실이다. 그는 이곳에 사는 동안 그림을 많이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를 찾아오는 후배들 중 그림 공부를 원하는 후배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박 화백이 타계하기 일 년 전인 2012년에는 그의 평생 친구 이상숙이 딸과 함께 이곳을 찾기도 했다. 이 여사는 “제가 아버님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선생님이 건강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는데 서울로 가 얼마 있지 않아 선생님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님이 크게 슬퍼했다”고 말한다. 이 여사는 당시 박 화백으로부터 정물화 한 점을 얻었는데 지금도 이 그림을 서울 집에 걸어 놓고 있다.
권 여사는 “남편이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 한시라도 고향 울산을 잊어 본 적이 없는데도 울산에서 활동한 시간이 많지 않아 울산사람들 중 남편을 아는 화가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