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 소설부문 당선작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다. 내가 처음 낡은 지하 단칸방을 찾아갔을 때도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본체가 80㎝는 넘어 보이는 구식 금성 텔레비전을 그녀는 방금이라도 두 팔로 껴안을 태세였다. 방 안의 형광등은 꺼져 있었고 텔레비전 모니터에선 푸른색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로고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집트 왕이었던 투탕카멘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을 거라는 성우의 목소리에 작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때 이상하게도 그녀의 작은 몸이 푸른 모니터 안으로 곧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고요하고 깊은 바다 속으로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한번은 그녀가 손님이 주문한 자반고등어를 썰다 말고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갔다. 다큐멘터리가 시작하고 심해에 사는 희귀한 물고기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곧장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성우가 설명하는 물고기들의 이름을 계산대 앞에 놓여 있던 낡은 검은색 장부에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손님이 항의해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반쯤 썰린 고등어를 두고 굵은 파마머리 손님이 두런거리며 사라졌다.

광명 시장 번영회라는 돋움체 글자가 까맣게 박힌 볼펜은 서걱거리며 ‘도끼 고기, 털 아귀, 귀신 고기, 은 상어, 상해 문어 덤보, 영리엽 새우, 풍선 장어, 자이언트 시프리스’를 썼다. 누군가 자음과 모음이 기형적으로 보이는 글씨를 주시하기라도 하는 듯 그녀는 왼손으로 글자를 가리며 썼다. 장부 속 글자들은 가게 앞 빨간 고무통에 담긴 멸치 떼처럼 떨고 있었다.

내가 4년 전 6밀리 카메라로 그녀의 삶을 기록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내게 물었었다. “그라니까, 나가 텔레비전 주인공이 되는 갑서.” 선선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예의상 거절하는 말이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도 없었다. 그녀는 온전히 행복한 표정으로 마치 내가 분에 넘치는 선물을 준 것처럼 글썽거렸다.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연거푸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동안 밥상에 놓인 자반고등어를 볼 때면 그녀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녀의 거친 손이 내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도 함께 떠올랐다. 그때마다 이유도 없이 가슴이 시큰거렸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주인공들은 저마다 독특한 삶의 태도와 방식을 갖고 있다. 연봉이 높은 직장을 두고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 젊은 부부도 있었다. 120㎏이 넘는 거구의 몸을 이끌고 마라톤이라는 노동에 가까운 취미를 견디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으며 미혼모의 삶을 감내하기로 한 열여섯 살의 소녀도 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내가 그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배들은 이런 내 생각을 프로의식의 부재라고 했다.

그날은 장기간 계속되는 기획 회의에 지쳐 회사 근처 재래시장을 돌아보았다. 새로 산 니콘 카메라 한 대를 들고 나서니 프로 사진작가가 된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며칠간 계속된 6월 말의 후덥지근한 날씨가 시장 안을 무겁게 눌렀다. 나는 오른손으로 카메라의 검은 줄을 두어 번 휘감아 단단히 들곤 시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재작년에 산 운동화에선 걸을 때마다 낡은 소리가 났다. 경기가 나빠져 재래시장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졸업하고 나서 우연히 듣게 되는 동창들의 소식과도 같았다. 늦은 오후, 좁다란 시장 골목길은 들려오는 소문처럼 한산했다.

습한 공기에도 회의에서 나왔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문득, 재래시장의 쓸쓸한 모습을 찍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소재이기는 하지만 낮과 밤의 초라한 시장의 모습이 클래식 음악과 맞물린다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낼 것 같았다. 드뷔시의 ‘달빛’과 함께하는 초라한 시장의 밤 풍경들. 나는 재래시장의 밤의 모습도 낮과 같기를 기대하면서 카메라의 셔터를 가볍게 눌렀다. 삶의 역동성이 넘쳐나는 곳 동시에 삶의 힘겨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곳, 카메라와 미디어가 사랑하는 시장이 아니던가. 시장은 다큐멘터리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바구니에 담긴 크기가 제각각인 애호박과 늙은 호박을, 노란 비닐 줄에 나란히 엮인 열두 마리의 조기 새끼들을, 미키 마우스 캐릭터가 조잡하게 박힌 오천 원짜리 티셔츠들을 찍었다.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카메라의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카메라 안엔 어린 배추와 상추들을 정리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어느새 자리 잡고 있었다. 확성기를 들고 과일 파는 젊은 사내의 모습도 구석에 보였다. 그들에겐 삶의 강렬한 의지들이 신문 속의 활자처럼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을 무엇을 카메라는 포착했다. 나는 왜곡이 본질을 압도하는 순간을 그때 보았다.

 

내가 4년 전 6밀리 카메라로 그녀의 삶을 기록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내게 물었었다. “그라니까, 나가 텔레비전 주인공이 되는 갑서.”

어쩌면 당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깊은 회의가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 4년을 작업하면서 찍은 다큐멘터리들이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생명을 다했다. 다큐멘터리는 지독하게 비효율적인 작업이다. 7년 동안 열편이 채 안 되는 작품들을 찍으면서 정작 내가 사는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기록자로서, 그들을 지독하게 짝사랑하는 것으로만 나는 존재했다. 하는 일에 갇혀 잃어버린 것들을 세어보고 있었을 무렵, 그녀를 만났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 시장 안. 한 번쯤 들렸을 법한 익숙한 생선 가게에서. 그녀는 생선 몇 마리의 값을 깎으려는 중년의 여인과 큰 소리로 실랑이하고 있었다.

그곳엔 재래시장에서 평생 생선을 판 63세의 노복녀 씨가 있었다. 언젠가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모습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비릿한 생선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어디선가 그녀를 찍으라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메라가 줌인 된 것처럼 내 두 눈은 그녀의 모습에 고정되었다. 찰칵,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감독으로 입봉 한 나의 첫 다큐멘터리의 콘셉트는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재래시장의 풍경이었다. 로버트 프랭크의 흑백 사진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느낌으로 기획했다. 가게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뭐랄까 쓸쓸하고도 따뜻했다.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의 편안함일까. 적어도 그녀가 앉아 있는 그곳은 시장의 분주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달 위를 천천히 걷는 우주인처럼 공간의 무중력을 견뎠다.

그녀의 살아온 생애가 꽤 유명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빌려 천천히 낭독되었다. 그녀는 열 살에 아버지를 열두 살엔 어머니를 여의었다. 외삼촌 집에서 자라다 열여섯 살에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가 먼 친척 조카라며 남편을 소개해줬다. 외사촌들의 눈칫밥에 신물이 났던 터라 이름도 묻지 않고 짐을 싸서 시집을 왔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남편은 키가 크고 피부가 흰 편이었다. 제대로 두 눈을 맞추며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가슴이 떨렸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짓는 농사만으로는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과 부모님을 모실 수 없었다. 그해 초겨울 남편은 일자리를 찾아서 하얗게 별이 뜬 새벽녘에 울산으로 떠났다. 특별히 배운 것도 기술도 없었던 그는 원양 어선을 타겠다고 했다. 삼 년 동안 그가 보낸 편지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물고기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남편은 편지에서 어린 아내에 대한 안부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쓴 수많은 물고기의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움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되었다.

남편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한 후,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시아버지가 울산으로 내려가서 남편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전보로 보내왔다. 일본 바다 근처 어디에서 원양 어선 전체가 침몰당하여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그 무렵, 뉴스에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금방이라도 방문을 두드리며 예의 그 긴 팔로 자는 그녀를 슬며시 흔들어 깨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흰 봉투에 담긴 보상금만이 그녀 앞으로 도착했다. 시아버지는 그 돈을 갓 스무 살이 된 며느리에게 모두 주었다. 다른 곳으로 가 재가를 하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시댁에서 나와 울산에서 처음 생선 가게를 연 것은 남편의 죽음을 믿지 못해서였다.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해서 더욱 실감하지 못했다. 언제고 항구로 들어오는 수많은 배 중, 하나를 타고 “내 왔다.”라고 말하며 선연히 웃을 것 같았다. 밤마다 항구에서 내려 방문을 두드리는 초췌한 남편의 모습에 놀라는 꿈을 꾸었다.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는데 5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뒤에 울산을 떠나 대구에 갈 수 있었고, 조금 더 지난 후에 지금 장사를 하는 경기도로 올 수 있었다. 생선을 팔아 번 돈은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달 잊지 않고 시댁에 보냈다. 온갖 생선들을 토막 치면서 그녀는 늘 세월이 모질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세월은 정말 모질었다.

그녀의 선행은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다큐멘터리 안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살아가는 일상을 작은 시장 안의 영상과 함께 충분히 보여 주었다. 새벽녘, 그녀가 두 평 남짓한 생선 가게의 문을 연다. 셔터가 드르륵 열리자 곧 도매상들이 흰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생선들을 배달해 온다. 배달 온 생선의 종류와 상태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은 하루 중 가장 생기가 넘친다. 생선들을 정리하고 늦은 아침 겸 점심인 도시락을 먹는다. 한낮, 시장은 고요하다. 그녀는 가게 안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자거나, 옆집 시장 상인들과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시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퇴근 시간 무렵, 그녀는 각가지 생선들을 썰면서 생선별 요리법을 젊은 새댁들에게 설명했다. 분주한 저녁 시간이 끝나자 그녀는 자장면을 먹으며 하루 매출을 확인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그녀의 일상은 40년이 넘게 계속된 것이다. 다른 생을 꿈꾸었으나 선택할 수 없었던 그녀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촬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 명의 스태프들에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커피와 술빵, 만두, 부침개 같은 시장에서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을 부지런히 대접했다. 초가을 무렵 시작한 다큐멘터리는 한 달 만에 촬영을 완료했다. 열흘 정도의 후반 작업 후, 운이 좋게도 꽤 인기 있는 공영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방송되었다. 채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연신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소리가 잦아질 때까지 긴 통화가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삶이 이렇게 보답 받게 된 것에 감사했다.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6개월 뒤쯤 7년간 몸담았던 프로덕션 일을 정리했고, 무작정 울산으로 내려갔다.

수화기 너머 뭘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내 푸념에 김 선배가 한번 울산에 다녀가라는 말을 했었다. 프로덕션에 사표를 제출한 날, 선배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와 곧장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울산행 KTX 표를 끊었다.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넌다는 두려움이 창밖의 선로처럼 수시로 교차했다.

울산의 한 방송국에 근무하는 김 선배는 내 첫 직장 사수였다. 그는 나의 방문에 매우 놀란 눈치였다. 수화기 너머 ‘전화라도 하고 내려오지.’라는 말 속에 진짜 내려오다니 놀랍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선배가 퇴근하고 나서 울산 사투리가 왱왱거리는 근처 횟집으로 이동했다. 마신 소주병이 네다섯 병이 되자 술에 취한 선배가 기획하는 일에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나, 다큐멘터리 하나 들어간다. 우리 귀신 고래 찍자.” “뭐라고요?” 그가 횟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대답했다. “귀, 신, 고, 래.” 김 선배의 말은 슈퍼맨이 되겠다거나 유에프오를 찾겠다는 어린아이의 호기 어린 말처럼 느껴졌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게 된 것 같은 결연한 김 선배의 표정이 조금은 황당하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해서 흔쾌히 답했다. “그래, 찍어요. 고래도 찍고, 물개도 찍고, 펭귄도 찍고, 다 찍자 구요!”

마른 세제 냄새가 가득한 모텔 방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사는 수많은 동물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기를 바랐다. 얼룩말, 기린, 물소, 코끼리, 톰슨가젤, 임팔라, 대머리 독수리를 볼 수 있기를, 과연 그런 매력적인 모험을 거부할 사람이 있을까. 물론 동물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아주 오랜 기간 오지를 탐험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국내에서는 작업하는 곳이 드물기도 했다. 하고 싶다는 말이 무색하게 정작 기회가 오자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네게는 사명감이 없다.’던 선배들의 날 선 말이 떠올랐다.

고래라니,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돌고래도 아니고 ‘귀신 고래’라니. 귀신 고래, 귀, 신, 고, 래, 귀, 이, 신, 고, 오, 래. 의식 없는 말들이 입술 밖으로 자꾸 나왔다. 모텔 방의 작은 창문 틈으로 네온사인의 푸른빛이 약을 올리듯 얼굴에 자꾸 들이쳤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생명을 마지막까지 다 토해내고서야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그녀가 늘 말했던 그녀의 모진 삶처럼 죽음 역시 모질었다.

거대한 하수구 배관이 육지 위로 불쑥 솟아난 느낌의 울산 남부 화학공단을 지나면 규모가 큰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장생포에 도착할 수 있다. 장생포는 60년대 후반까지 고래들을 포획하는 어선이 드나드는 규모가 꽤 큰 항구였다. 나지막한 현대식 건물인 횟집들이 모여 있는 해안선을 따라 가다 보면, 장생포 중앙에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고래 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고래바다 탐험선 역시 그곳에서 탈 수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유치원에서 소풍을 나온 아이들과 함께 고래 탐험선에 오르면서도 과연 고래를 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상상해도 고래는 그저 어린이 대공원의 돌고래 쇼가 전부였다. 살면서 고래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관심을 둬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단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에 불과했다. 카메라가 클로즈업했을 때, 주인공이 말간 눈으로 벚꽃을 바라본다든지,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고양이나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다든지, 천천히 길 위를 걷는 주인공 뒤로 단풍이 우거진 가로수나, 시야를 가리지 않는 나지막한 산들이 필요했다. 그런 장면은 언제나 다큐멘터리의 끝 부분,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했다. 그러나 고래는 달랐다. 그것은 인간과 함께 담을 수 없었다. 카메라에 쉽게 담지 못한다는 것, 단순하게도 그런 까닭에 나는 고래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고래 탐험 선상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의 거대한 몸체와 거친 질감의 회색 등에 단숨에 매혹되었다. 유화에서 붓으로 덧칠하기를 반복한 것처럼 그의 등은 돌고래의 매끄러운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2미터가 넘는 파도를 가르며 그는 육중한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헤엄쳤다. 차가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 그의 등은 군데군데 굴 껍데기, 조개 삿갓, 따개비 등이 붙어 있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갈가리 찢진 그의 상처는 염분이 가득한 바닷물에 깊게 쓸렸을 것이다. 깊은 상처가 겨우 아물었을 자국들은 꽃잎 같은 거뭇거뭇한 흔적을 남겼다. 그를 본 순간, 나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믿는 미의 기준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깨달았다.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서 찢기고 부서진 등, 또 켜켜이 상처가 아문 등을 가진 거대한 귀신 고래야말로 아름다웠다. 아니, 경이로웠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소리를 높였다. 선상에서 방송 해설이 나왔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고래야! 여기 좀 봐!”라는 아이들의 외침이 워낙 크기도 했지만, 공허한 설명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그가 시야에서 멀리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 위에 모든 사람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난 커서 고래가 될 거야!”라고 외치는 한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될 수 있다면 그 아이의 바람처럼 나도 거대한 고래가 되고 싶었다. 인간처럼 작고 연약한 것들을 한 번이라도 웅숭깊게 바라볼 수 있기를…. 그렇게 거대한 몸체를 가진 것은 삶을 어떻게 볼지 또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졌다. 바다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지만, 목 안 깊숙한 곳이 계속 간질거렸다.

그를 찍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자 선배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수영장에 등록했다. 뜻밖에 몸이 쉽게 물에 떴고, 수영도 다른 수강자들에 비해 빨리 배웠다. 그러나 스킨스쿠버는 달랐다.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배운 후 바다에 처음으로 잠수했을 때, 두려움이 온몸을 묶었다. 산소 호흡기가 곧 멈출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온몸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분명히 수중 카메라가 부력에 의해 무겁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정작 카메라는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철근 덩어리였다. 당장에라도 깊은 바다 속으로 작은 두 손부터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물속의 공포를 없애는 방법 따윈 없었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내내 두통과 신열에 시달렸다.

시간이 지나고서 물속 움직임에 약간 익숙해지긴 했지만, 입수할 때의 두려움만큼은 결코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울산에서 촬영을 시작했다면 어쩌면 더 견딜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 고래를 촬영한 곳은 일본의 오호츠크 해였고, 낯섦은 물속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푸르다고만 생각했던 바다의 빛깔이 완연히 달랐고, 물고기의 종류도 달랐다. 잠수를 할 때마다 전혀 새로운 곳,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자궁에 있는 아이가 처음부터 시력을 가졌다면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주 무겁고 넓고 어두운 곳에 버려진 느낌,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진 절망적인 느낌말이다.

나의 절망과는 상관없다는 듯, 그는 명랑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동해에서 보았던 그보다 몸집이 조금 더 작은 귀신 고래였다.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는 나의 존재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 옆을 유유히 지난 그는 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몸체를 가볍게 움직이며 바닥으로 이동했다. 그는 턱으로 바닥의 흙을 휘젓고 나서, 흙덩어리를 통째로 삼키는 일에 몰두했다. 입 옆으로 흙이 뿜어져 나왔고, 맑았던 시야가 탁해졌다. 바닥에 있는 미생물들을 먹는 그의 식성은 덩치에 맞지 않게 요란스러웠다.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데 작은 플랑크톤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는 그저 넓고 넓은 바다 속 진흙을 장난치듯이 삼키고 또 삼켰다. 그의 식사는 마치 흙장난을 하는 어린아이들의 놀이 같았다.

뿌연 시야 속에서 그를 보았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천연이 먹이를 찾는, 내가 있거나 없거나 언제나 그 모습일, 그가 보였다. 호흡이 가빠오지도 않았고 폐부에 공기가 부족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의 거대한 몸체도 두렵지 않았다. 그저 그를 만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여배우가 눈물을 머금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처럼 최근의 일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작 40분가량의 홍보 영상에 가까운 다큐멘터리를 위해 1년 이상 수영과 스킨스쿠버를 배우는데 매달렸다. 밤마다 물에 빠져 숨을 못 쉬는 악몽을 꾸었고, 물에 대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증까지 겪어야 했다. 힘겹고 지겹고 아팠던 것들이 모두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그가 보였다. 흙을 뱉어 내는 통에 시야는 가려졌지만, 그가 그의 존재가 선명하게 보였다. 희뿌연 시야가 맑아지는 시간 동안 그는 또 멀리멀리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이 잔잔한 물결처럼 아른거렸다.

그의 몸 안에는 JDP-307이란 글자가 새겨진 위치 추적 장치가 있다. 고래가 멸종 위기에 놓이자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국립 고래 연구소를 설치했다. 연구소에서는 고래 보호를 위해 바닷가에 떠내려 온 고래들에게 고유번호를 매겨 작은 위치 추적기를 지방이 가장 많이 있는 고래의 배 부분에 장착했다. 그 후 고래들을 다시 바다에 풀어주고 그들의 생태를 관찰했다. 그의 위치는 일본 국립 고래 연구소 측의 도움을 받아 한 달 이상 추적한 결과 예측할 수 있었다. 정확한 촬영을 위해 그가 움직일 항로를 미리 연구했다. 그가 물 위로 파도를 가르는 모습은 한 달 동안 여러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숨을 쉬기 위해 바다 위로 자주 나오는 고래의 습성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바다 속에서 촬영한 부분은 오직 먹이를 찾는 부분이 전부였다. 과학의 힘을 아무리 빌려도 인간이 고래라는 생물을 관찰하는 것은 여전히 요원했다.

촬영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일본 연구소 측에서 연락이 왔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편집실에선 그가 여전히 푸른 바다를 시원스레 가르며 기분 좋게 먹이를 구하고 있었다. 짧은 그와의 만남은 이십 여분 가량의 필름 속에 오롯이 남았다. 불현듯 찾아온 그의 죽음은 꿈속을 헤매는 듯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죽음이란 인간이나 동물에게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평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볼 수 없는 그에 대한 경외가 컸던 탓인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직접 들었어도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언제라도 짙푸른 바다 속에서 먹이를 찾기 위해 장난치듯 고개를 좌우로 움직일 것 같았다. 여전히 내가 직접 보았고 기억하는 그의 모습, 내가 카메라에 담은 그 모습이 내겐 전부였다. 소식을 듣고 난 후, 바다 속에서 촬영한 필름 중 단 1초도 자르지 못했고 편집 마무리는 김 선배의 몫이 되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었던 그녀가 아니었다.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시장 통을 누비며 “선생님!”을 외쳤던 건강했던 그녀가 사라졌다. 대신 낮고 작게 “억울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있었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보아 달라며 악다구니를 쓰는 것과 같았다. 방식은 예전과 달랐지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끝없이 받아줄 것을 원했다.

30분의 면회 시간 동안, 그녀는 살아온 날들이 억울하고 그렇게 살아온 방식도 억울하다고 했다. 모든 것이 그저 억울하다고만 했다. 좋아하던 전복을 팔기만 하고 먹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고, 남편이 사라졌다는 일본의 어느 바닷가를 직접 걸어보지 못한 것도 후회했다. 남들이 다 두는 자식 하나 키워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고, 다른 사람들을 돕느라 그 흔한 아파트 하나 갖지 못한 것도 후회했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후회로 가득했다.

모진 년의 팔자를 운운하던 그녀가 점점 크게 소리를 내며 아이처럼 울었다. 간호사가 달려와 환자를 자극하지 말라고 내게 주의를 주었다.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면회 시간 동안 그녀의 마른 손을 잡아 주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알싸한 약품 냄새가 너무 독해 속이 메슥거렸고 입술이 자꾸 말랐다. 중환자실의 차가운 공기가 어깨를 자꾸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도 투명한 비닐에 담긴 작은 카메라는 테이블 위에서 나와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담아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다큐멘터리를 찍는 일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알고 있다. 병이 한 사람이 가진 혹은 적어도 믿었던 성품의 바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기록은 삭제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번 다큐멘터리는 나의 요청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내게 전화를 했을 때, 그녀가 카메라를 가지고 오길 원한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길고 긴 하소연이 끝날 무렵, 그녀가 내게 자신의 병원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

“선생님, 나 그 고래처럼 그려주소.”

중환자실을 나와서 병원 앞 벤치에 주저앉아 어느새 잊고 있었던 심해 속의 그를 떠올렸다. 자동문을 나오던 휠체어가 병원 로비의 대리석 기둥에 부딪혀 “끼익”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온몸을 움츠리게 한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바다 속 높고 명랑했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화면을 꽉 채웠던 아름다운 그와 그의 죽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그의 죽음은 비참하다 못해 초라했다. 연구소에서 소식을 듣고 한동안 그의 죽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을 편집실에서 고민했었다. 어떤 밤엔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피우던 담배 연기가 자꾸 주변을 맴돌았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진실에 닿지 않는 그의 죽음 앞에, 또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재차 확인했다.

영원히 바다로 사라진, 귀신 고래와의 30일. 이 평범한 문구가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급작스럽게 바뀐 해류에 이끌려 해변에서 서서히 죽어간 그의 죽음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거대한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내장 기관이 중력에 의해 천천히 파열되어 고통스럽게 죽었을 그에 관한 진실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죽음은 다큐멘터리 안에서 아무것도 전해진 바 없다. 재수 없게 급류에 떠 내려와 무기력하게 죽어간 그의 죽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몸 안에 저장된 위치 추적기가 고장이나 급히 손을 쓸 수 없었던, 딱 맞아떨어진 불행이 그의 죽음이었다. 어쩌면 그런 것이 그녀에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불행을 말하지 않는 방법으로 죽음은 아름다워질 수 있을 테니까.

프로덕션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모든 음향 부분을 삭제했다. 그녀의 후회 어린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아주 조용한 모습의 그녀가 있다. 입술을 움직이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 병약한 그녀가 보인다. 죽음의 근처 어디쯤을 배회할 그녀를 위해 나는 편집을 시작했다. 전에 찍었던 자료에서 다시 쓸 만한 부분을 찾았다.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달랐지만, 그 둘은 같아야만 했다. 시장과 병원이, 예전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잘 어울려야 했다. 명도와 채도를 조절함으로써 음악과 내레이션을 유사하게 구현함으로써 같지만 다른 다큐멘터리가 시작되었다.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걸어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그즈음, 끊었던 담배를 사서 입에 물곤 필터를 잘근잘근 깨무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기면서 기이한 행동이 시작되었다. 우선 온갖 음식들을 병원 안으로 들이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위암 환자가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먹는 동시에 토하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녀는 로마 시대의 귀족처럼 온갖 음식의 맛만 보고 뱉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방사선 치료 기간에 환자 대부분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 머리카락은 독한 치료로 거의 빠지고, 소화 흡수력도 떨어져서 급격하게 야윈다. 그녀 역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에 대해서만은 집착을 멈추지 않았다. 후원했던 대학생들에게 돌아가면서 전화를 했고, 병원에 올 때 가지고 올 음식의 품목을 정해주었다. 수첩에 빼곡히 적힌 모든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은 여느 환자들이 가진 체념이나 분노와는 달랐다.

어떤 날은 퇴원하면 입을 옷을 산다며 내 손을 빌려 인터넷 쇼핑을 했다. 항암 치료 기간이 끝날 11월에 대비해 모피 코트며 가죽 가방, 화려한 장식의 구두를 사들였다. 그 모습은 마치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기를 다짐하는 제의 같았다. 젊음도, 재산도, 가족도, 그 무엇도 지킬 것이 없는 그녀가, 살아남아 반드시 지켜야 할 무엇이 있는 것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폭력성도 더해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던졌고, 간병인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으며, 병원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도 자주 화를 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그런 의미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죽어 가는데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냐고, 제발 뭐라도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 같았다. 그런 날은 멍청하게 테이프나 감는 카메라를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녀의 안과 밖에서 쏟아지는 비명에 두 귀를 막고, 형편없이 야윈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는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죽음이란 고통을 바라보기만 한 나는 허공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모습이 죽음의 한 단면인가. 아니면 죽음은 다 저런 모습인 것인가. 저렇게 하찮고 무기력한 것인가. 죽음이 모든 인간이 결국 도달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본 그녀는 살고 싶다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곳을 향해 계속 질주했다. 그녀가 살고 싶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난 왜 그녀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자신이 살고 싶었던 만큼 죽음을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역시나 추측하고 왜곡할 뿐이다.

그녀가 소리를 내지르고 악을 쓸 때, 두 눈동자에 어린 분노 이외에 반드시 무엇이 있어야 했다. 아니, 그 이면의 것이 무엇이든 있기를 바랐다. 만약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쩌면 내가 절망할 테니까. 너무 가볍고 시시하고 지긋지긋해서 그것이 진실이고, 진리이고, 신이라 해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찾았다. 찾고 있었다. 그도 그렇게 죽었겠지. 큰 몸체를 어떻게든 돌려서 태양 빛이 내리쬐는 모래밭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겠지. 내장들이 무너지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눈가에 핏빛 눈물이 맺혀도 미친 듯이 온몸을 움직여 자신의 생이 시작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테지. 조금만 돌리면 있을 것 같은 삶의 터전, 생명의 공간을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갈구했겠지. 우리 모두 삶밖에 모르는 가여운 생이었으니….

굵고 거칠고 검은 그녀의 손가락이 차가운 침대 위로 떨어지는 데 1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새벽 네 시, 급하게 연락받고 달려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중환자실 밖에서 시계를 바라보며 두 손을 움직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생명을 마지막까지 다 토해내고서야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그녀가 늘 말했던 그녀의 모진 삶처럼 죽음 역시 모질었다. 그녀가 꿈꾸었던 바다 속 고래와 같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고통스러운 죽음이란 점에서는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검푸른 얼굴을 그렇게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잡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머뭇거리다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고 했을 때, 어쩐지 서늘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와 눈을 맞추며 말을 하고 밥을 먹었던 사람이란 생각이 안 든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의 손이 내 뒷목을 잡고 앙칼지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무서웠다. 병원 이름이 새겨진 흰색의 침대보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그녀의 죽음이 슬퍼졌다. 외사촌 동생들의 묵묵한 표정을 바라보니 마땅한 가족이 없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결국, 4개월에 걸친 그녀의 두 번째 촬영도 끝이 났다. 병원을 나오며 조금은 시원하다고도 생각했다. 눈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건 아쉬움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기록하는 자라는 천형에 대한 해방감이었다. 그녀에게 조금 미안했고, 깊이 안도했다.

텅 빈 편집실에 앉아서 그녀 이름이 기록된 테이프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던 그녀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어 삶과 죽음을 남겼다. 나는 충실하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기록했다. 내 시선이 없었다고 부정하지는 않겠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담지도 못했다. 다만, 담았다. 최선을 다해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아프지 않을 만큼의 진실을 담았다. 영상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그녀의 생은 그 어느 무더운 날의 사진처럼 선명했다.

뭉그러진 그녀의 손가락이 푸른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거칠고 질박한 목소리가 사라졌다. 코끝을 자극하던 비릿한 냄새도 사라졌다. 작았던 몸과 잔주름이 많았던 얼굴도 사라졌다. 화면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걷던 시장 골목과 휠체어로 움직였던 병원 병동의 푸른 벽면이 사라졌다. 단단한 사각의 공간에 그녀의 이미지들이 영혼과 분리되어 화면에 박혔다.

그녀는 무엇인지 모를 이야기를 머뭇거리며 나에게 건넸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지웠고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두려움을, 삶의 고통을, 그 나약함을 모두 지웠다. 그것들이 세상 속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원치 않았기에 그리고 나도 원치 않았기에 지웠다. 그녀의 바람이기도 했던 일을, 나는 했다. 살아있는 한 나는 계속 이렇게 지우는 것을 감추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감출수록 분명해지고 드러낼수록 사라지는 애처로운 영상들이 화면 사이를 오고 갔다. 명치끝에 형체도 없는 것들이 나를 짓눌렀다. 또 생의 끝에 남을 것도 이렇게 한없이 무거운 것이리라.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다. 내가 처음 낡은 지하 단칸방을 찾아갔을 때도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본체가 80㎝는 넘어 보이는 구식 금성 텔레비전을 그녀는 방금이라도 두 팔로 껴안을 태세였다. 방 안의 형광등은 꺼져 있었고 텔레비전 모니터에선 푸른색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로고가 떠올랐다. 그때 정말 이상하게도 그녀의 작은 몸이 푸른 모니터 안으로 곧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고요하고 깊은 바다 속으로 그녀가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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