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현오 울산시티병원 원장

▲ 조현오 울산시티병원장은 의료빈국 청소년들중 선천성 기형, 골형성 부전증 등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들에게 무료수술로 새 삶을 선물해 주고 있다. 그는 “가진 능력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인생 후반부가 참으로 의미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

서울대 의대·육군 특전사 출신에
수필집도 출간한 팔방미인
인공관절 수술만 4천여회 이상
정형외과 전문의로 국내 최다 수준
국제의료봉사로 나눔 의지 확고해져
의료빈국 장애 청소년들에 새삶 선사
“나를 필요로하는 환자들 진료하며
시티병원 의사로서 생 마감하고파”

지(智)·덕(德)·체(體)를 고루 갖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타고난 재능에 근면·성실성까지 갖추고 늘 따뜻한 미소로 행복전도사를 자임하며 나눔과 베품을 남은 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울산시티병원 조현오 원장.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서울대 의대 진학을 당연시 여길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미소가 잘 어울리는 준수한 외모에, 힘들기로 유명한 육군 특전사 훈련까지 이겨낸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했다. 게다가 ‘겸손’까지 갖추고 정형외과 전문의로 무료수술 등 의료봉사에 최우선 순위를 두면서 베풀줄 아는 ‘참 삶’을 실천하고 있는 그의 일과 인생을 들여다본다.

-선천성 질병으로 제대로 걷거나 뛰어본 적이 없는 해외 청소년들의 무료수술에 열정적이다.

“학창시절부터 의료봉사를 통한 나눔, 베품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나이 50을 넘기면서 드는 생각이 죽어서 하늘에서 뭘 하고 왔느냐고 물으면 그저 일 열심히 하고 돈벌다 왔다고만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그 가운데 나누는게 제일 좋다는 것을 알았다. 가진 능력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인생 후반부가 참으로 의미있을 것 같았다. 2008년 6월 울산의료단 소속으로 몽골 울란바토르 바양골보건소로 국제의료봉사를 다녀오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몽골과 캄보디아, 중국, 러시아 등 의료빈국 청소년들중 선천성 기형, 골형성 부전증 등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고, 수술만해주면 그들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료수술봉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30명 넘게 수술해준 것 같다. 체재비까지 1인당 평균 2000~3000만원 정도 비용이 들지만 병원의 적극적인 협조로 가능했다. 최근에는 딜게르 머른(양측 대퇴골 및 경골 골형성 부전증)이라는 몽골의 12세 남자 아이를 보살피고 있다. 2008년 몽골 무료 진료당시 인연을 맺었고, 2010년 12월 시티병원으로 초청해 1,2차 교정 수술을 한 뒤 2014년 다시 초청, 3,4차 수술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 진 아이였다. 그렇지만 성장에 따른 병의 진행으로 5,6,7,8차 수술이 불가피해졌고, 3개월간의 일정으로 다시 치료를 받고 있다.”

-정형외과 전문의로 인공관절 수술 국내 최다 기록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국내 최다는 아닌 것 같고, 아마 다섯 손가락안에는 들지 않을까. 백병원에서부터 동강병원, 시티병원에 이르기까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4000여회 정도되는 것 같다. 인공 관절을 제외한 수술도 1만6000여회에 이른다. 지금도 입원환자의 20% 정도를 담당하고 있다. 수술로 시작해 수술로 하루가 저문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렇듯이 마지막 꽃을 피운다는 심정으로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하고 있다.”

-울산시티병원의 성장사에서는 원장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2004년 병원을 지을 때부터 함께 했다. 의료분야의 기술적 문제는 내가, 행정은 이사장이 맡았다. 127병상으로 출발, 450병상 규모로 성장했다. 매출액이 한달 4500만원 정도에서 지금은 40억원을 웃돌고 있으니 괄목성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하다. 그렇지만 개인적 욕심은 부리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병원 성장에 따른 과실을 병원 식구들과 골고루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수술을 얼마나 하든 아내와 단 둘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돈만 있으면 된다. 만약 일한 만큼 받는다면 지금의 3~4배는 받아야 할 것이다. 매일 아침 조회를 매듭짓는 마지막 구호가 ‘사랑, 봉사, 나눔, 하나된 마음으로 이루자 소망을, 사랑을, 시민에게 건강을 직원에겐 보람을’이다. 무료수술봉사도 같은 취지라고 보면된다. 경비 지출은 있지만 450명의 직원들이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이는 곧 병원의 좋은 분위기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역투자인 셈이다.”

-다른 분야의 활동도 수준급인 것으로 알고 있다. 스포츠 마니아이면서 몇년전에는 <사랑은 강물처럼>이라는 첫 수필집을 냈다.

“닉네임이 행복전도사이다. 작은데서 큰 행복을 추구하려는 노력 때문일 것이다. 항상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르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보는 사람도 미소 짓는다. 나비효과라고 할까, 나의 작은 행동이 기쁨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실제로 주위사람과 나누면서 얻는 기쁨이 오래간다. 수필집은 그 연장선상에서 얻어진 것이다. 병원이나 사회분위기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들을 묶었기 때문이다. 또 스포츠도 좋아했다. 윈드서핑, 요트, 스키, 승마를 비롯해 구기운동까지 안해 본 것이 없다. 한때는 마라톤에 빠졌다. 그렇지만 50대까지였다. 나이가 들수록 관절이 중요한데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은 자전거와 걷기에 주력한다. 또 꾸준히 할 일과 친구를 만드는데 공을 들인다.”

-고향은 진주이고 학창생활을 서울에서 했다. 울산과의 인연은.

“학교 생활을 마치고 부산 백병원에서 근무했다. 8년간 일했다. 그리고는 동강병원으로 옮겼다. 개인적으로 학교 선배였던 당시 이사장의 부탁이 있었고, 집안과의 인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인제대 교무부학장으로 총장에 대한 꿈을 접은 채였다. 결과적으로는 의사로서의 행복을 찾은 계기가 됐다. 지금은 시티병원에서 의사로서의 생을 마감하겠다는 생각뿐이다. 병원 전체 입원환자가 240명인데, 내 앞으로 입원한 환자가 50명이다. 환자를 위해서는 내가 건강해야 한다. 정형외과의 특성상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오래간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끊을 수 없다. 고령환자들이 나를 찾는 이유인 것 같다. 의사의 정년은 체력과 정신이 될 때까지이다. 눈은 괜찮고, 손도 괜찮고, 머리도 괜찮다. 앞으로도 5년은 가능하지 않을까. 외래는 80이 넘어서도 가능하지만 너무 노욕을 부려서는 안될 것 같다.”

-성장과정이 궁금하다. 또 의사로 입문,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부모님들이 해방직전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진주에 정착했다. 2남6녀 중 끝에서 두번째다. 30년간의 일본 생활에서 운수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던 아버지 때문에 가정형편도 괜찮았다. 진주에서 제일 큰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직과 성실을 모토로 삼았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8남매 모두 잘 컸다. 머리가 좋았던 형, 누나들이 서울로 진학하면서 나를 데려갔다. 공부를 안할 수 없었다. 당연히 서울대 의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거기에다 특전사 근무로 체력·정신적으로 강인해졌다. 또 목표는 높게 잡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우쳤다. 지금도 땀흘리는 수고를 거치지 않고서는 기쁨을 얻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이태철 논설위원

▲ 조현오 울산시티병원 원장

조현오 원장은

1946년생.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서울대병원에서 정형외과 전공의 과정을 거친 뒤 인제대부산백병원 부교수, 정형외과과장, 교무부학장과 동강병원장을 역임했다. 또 하버드대학교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및 보스턴 소아병원 연수를 시작으로 뉴욕 코넬대학 특수병원 인공관절, 소아정형외과 연수와 독일 홈부프크대학, 파리 제4대학, 스위스 베른대학 단기 연수과정을 거쳤으며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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