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현 남목중학교 교사
영화관에 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볼까?’를 결정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스케일이 큰가. 둘째,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난가. 셋째. 해당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얼마나 부족한가. 줄거리를 모르고 가야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지론에 따라 세 가지 기준 중 최종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체로 세 번째 기준이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봤던 수많은 영화들 중 이 세 번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에도 망설임 없이 선택한 영화가 한 편 있었으니 바로 황동혁 감독, 이병헌·김윤석 주연의 ‘남한산성’이었다.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한(漢)족의 명은 기운이 다해가고 있었던 반면 만주족의 청은 팔기군의 위력을 앞세워 명을 대체할 새로운 태양이 될 조짐을 보이며 궐기하고 있었다. 그러한 국제 정세의 흐름을 알고 있었음에도 임진왜란 당시 명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입었다는 명분, 하늘 아래 천자는 명의 황제뿐이라는 명분을 지켜야 했던 인조의 조정은 궁을 떠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짓이겨가며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영화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조선 조정이 청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며 항복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프고, 답답하고, 허무할 뿐이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본 후 세 달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왜 나의 역사 수업은 이 영화만큼 큰 감동을 주지 못했던 걸까?’라는 미묘한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일에 무신경했던 탓에 공부를 하든, 업무를 하든 스트레스가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남한산성’을 보고 난 후부터 조선의 1636년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재연해 낸 감독과 배우들에게 단순한 시샘 이상의 질투를 느끼게 되었다. 물론 원작인 김훈의 소설도,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도 가상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실제와 함께 버무려 낸 창작물이기에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가려서 전달해야 하는 수업 중에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배우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소생시킨 인조, 김상헌, 최명길, 이시백, 용골대, 홍타이지와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은 내가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보며 그들에 대해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있었으며, 그들의 대사는 지금­여기의 우리에게도 지도자와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할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약 8년 전 신규 교사 직무연수를 들으며 다이어리 맨 앞장에 몇 가지 목표를 적어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5년 안에 울산에서 가장 역사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이 되자”였다.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목표다. 수업을 잘하시는 선배, 동료, 후배 선생님들이 너무 많은 관계로 앞으로도 이루기 힘든 목표일 것 같다. 그러나 매년 이맘때만 되면 기한을 넘겨 제출하지 못한 숙제처럼 계속 떠올라 나를 채찍질한다. 올해는 이미 기한을 넘겨버린 저 예전 목표 대신 “영화보다 깊은 울림을 주는 역사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 되자”를 목표로 삼기로 했다. 학생들로 하여금 지나간 과거의 일을 통해 지금­여기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자라서 역사 수업을 통해 배운 것을 오랫동안 머리와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정현 남목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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