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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기획특집인물로 읽는 울산유사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282)]일제강점기 지어진 철도청 관사의 목욕탕 울산넝마촌의 시작문화예술편 (26)울산넝마촌의 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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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14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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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60년대 울산에는 넝마촌이 있었다. 지금의 울산시 중구 성남동 ‘젊음의 거리’ 즈음 된다. 현재 그 자리에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해방 전후 철도청 관사 가족들의 목욕탕이었던 그 자리다. 6·25 이후 넝마촌이 되었다가 60년대 중반 동원예식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건물에 꽃그림이 그려져 있는 곳에 넝마촌 건물의 환기통이 있었다.

중구 ‘젊음의거리’ 넝마꾼 집중적 거주
‘거지-문학소녀 결혼’으로 전국에도 소개
결혼 말린 신부부모도 ‘천생연분’ 인정
독지가 도움으로 안정된 일자리까지 찾아
동원예식장 지으며 1965년 넝마촌 사라져
일부 넝마꾼 태화교 밑에서 생활 이어가


해방을 전후해 우리나라에는 넝마주이가 많았다. 넝마꾼으로도 불린 이들은 헝겊과 헌 종이, 박스, 빈병 등 길가에 버려져있던 물건이나 혹은 고철, 구리, 고물을 주워 고물상에 파는 일을 했다.

울산에 넝마꾼들이 많아진 것은 해방 후 귀국 동포들이 늘어나면서다. 귀국 동포들은 주로 중구 계비고개와 남구 현 한국은행 자리에 많이 살았는데 이들이 먹고 살길이 없어 천막을 쳐놓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주로 넝마꾼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6·25가 일어나면서 이곳 보다 더 큰 넝마촌이 울산에 형성되었다. 오늘날 중구의 가장 번화가인 ‘젊음의 거리’ 중 옛날 울산전신전화국이 있었던 자리에 넝마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생활했다.

일제강점기 철도청은 성남동에 철도역을 세운 후 나중에 역을 학성동으로 옮기면서 역 자리에 철도관사를 많이 건립했다. 그때 관사 내에 관사식구들이 이용할 수 있는 큰 목욕탕도 지었다. 이 목욕탕은 넓이가 150㎡(약 40~50평) 정도로 건물 내에는 3개의 작은 건물을 따로 두어 관사 식구들이 언제든지 불을 땐 후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1·4후퇴 때 피난민들이 울산에 와 보니 먹을 것은 고사하고 잠자리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 중 50~60명이 당시 비어 있던 이 목욕탕에 들어가 잠자리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울산넝마촌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숙소는 마련했지만 당장 먹을 것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가족들 중 어린이들은 아침에 깡통을 들고 성남동과 옥교동, 학성동까지 가 밥을 얻어 와야 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광주리를 메고 거리를 다니면서 천과 휴지 등을 주워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1950년대만 해도 우리사회는 물자가 부족해 이들은 물자부족을 덜어주는 첨병 역할을 했다.

넝마꾼들의 제일 큰 걱정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울산넝마촌 사람들이 배가 고팠을 때 이들의 배를 채워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6·25가 일어났을 때 넝마촌에서 가까웠던 지금의 중부소방서 자리에는 미군들이 통신본부를 차린 후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 병사들은 본부 옆에 고급 막사 2개를 세워 놓고 이곳에서 거주했다.

이 때 미군 막사에는 미군들의 잔일을 돕는 하우스보이 한명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비대해 ‘뚱보’라는 별명을 가졌던 이 하우스보이는 당시 미군막사에서 나오는 ‘짬밥’을 매일 아침 넝마촌으로 가져와 넝마꾼들의 배고픔을 달래 주었다. 이 하우스보이는 미군이 돌아간 후에는 상이용사들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넝마촌 출신으로 울산사람들이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넝마촌의 보스 장모씨였다. 넝마촌은 전쟁으로 각 지역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부랑아들이 많아 어느 단체보다 위계질서가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장씨는 넝마촌 보스로 이런 부랑아들을 잘 통솔한다는 소문이 알려졌고 이 소문을 들은 울산극장의 허용택 사장이 그를 극장 기도로 세웠다. 허 사장은 일제강점기 영화관을 운영해 울산사람들에게는 일본 이름 ‘나까노’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건달들과 어깨 등 소위 깡패들이 많았다. 그런데 새 영화가 들어오면 항상 이들이 극장에 몰려와 영화를 공짜로 보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자기들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극장 주인들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이 때문에 허 사장은 장씨를 기도로 세웠는데 이때부터 극장을 찾는 건달과 어깨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 고교생으로 울산극장을 자주 드나들었던 최영수(78)씨는 “장씨는 비록 넝마촌 출신이었지만 힘이 세고 위엄이 있어 장씨가 기도가 된 후에는 공짜로 영화를 보겠다는 건달들이 울산극장 앞에 얼씬거릴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울산 극장가에서 유명했던 장씨는 1965년 남구 번영로 현 세이브 존 옆 도로를 건너다 교통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는 숨을 거둘 때 부인과 두 딸이 넝마촌에서 살고 있었다.

울산넝마촌이 전국 뉴스의 초점이 된 적이 있다. 1963년 2월25일 경향신문은 ‘문학소녀가 거지와 결혼’이라는 제목과 함께 ‘21세의 무남독녀가 울산넝마촌의 넝마주이와 결혼했는데 신방은 토굴’이라는 글을 써 놓고 있다. 그리고는 신부 부모들이 처음에는 결혼을 말렸으나 나중에는 연분으로 믿고 이를 허락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들이 결혼 후 독지가를 만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보도도 함께 하고 있다. 5단 박스로 쓴 긴 내용의 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걸인이 시인 소녀와 백년해로의 가약을 맺었다. 이들의 결혼은 무남독녀 문학소녀가 가정을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6·25 때 당시 한강에서 부모 형제를 모두 잃고 홀몸으로 울산에 와 10년간 걸인으로 토굴 생활을 해 왔던 김종호(29)군과 충남 공주가 본적이며 대전호수돈 여고를 졸업한 김순자(21)양이다.

학창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해 책을 많이 읽었던 신부는 현재 대구에 살고 있는 김재준씨의 무남독녀다. 그는 평소 허영에 들떠 있는 여성들에게 충격을 주겠다는 결심으로 집을 뛰쳐나온 후 울산으로 와 울산에서 꽃을 팔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성남동 길에서 초라한 옷을 입은 김종호군을 만났다. 신부는 김군에게 “당신들 같은 걸인들도 하루하루의 생활에 만족하고 때로는 여자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술에 만취되어 있던 김군이 이에 대한 대답을 했고 이 대답을 통해 김군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신부가 그를 받아들여 결혼하게 되었다. 이 후 김군이 사는 토굴로 들어간 신부는 외부에서 얻어온 음식을 넝마촌에서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살았다. 김군은 결혼 당시 걸인이었지만 한 때는 목사 아들로 신성악극단에서 트럼펫을 불며 대구와 부산 등 영남 일대를 돌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처럼 안락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토굴에 뜻밖에 경찰관과 신부 어머니가 나타났다. 처음 김군은 신부를 납치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신부가 김군과 함께 살겠다고 말해 김군이 혐의에서 벗어났고 딸의 손을 잡고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어머니도 ‘이것이 너희들의 연분인가 보다’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단념하고 사위의 숙소인 토굴로 들어가 이틀 밤이나 동숙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소식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부산 위생업소는 이들 부부에게 일자리를 주어 이들은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부산으로 갔다. 실제로 이 기사는 당시 부산일보 이철응 기자가 먼저 취재해 부산일보에 실었는데 이를 경향신문에서 다시 심층 취재 해 나오진 기자 이름으로 내어 보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이들 부부들이 토굴에서 살고 있을 때 이들의 생활을 자세히 지켜본 사람이 김기석(73)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울산광역시 중구지회장이다.

“김씨 부부의 결혼 얘기가 신문에 보도가 되자 이후 많은 사람들이 토굴을 찾아와 그들 부부를 위로하고 돌아갔습니다. 특히 울산제일 중 3회 출신으로 심완구 시장과 동기였던 김종규씨는 당시 부모님이 철도관사에 살았기 때문에 이들 부부가 부산으로 가기 전 자주 찾아와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김씨에 따르면 김씨 부부가 살았던 집은 반 지하였지만 철도청이 목욕탕 건물을 지을 때 환기통을 잘 내어 놓아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넝마촌은 1965년 사진작가 김규현씨가 철도청으로부터 이 건물을 불하 받아 이곳에 동원예식장을 지으면서 사라졌다. 이 때 넝마촌에 살았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 외지로 이사를 갔고 일부 넝마꾼들은 태화다리 아래로 가 이곳에서 계속 넝마주이 생활을 했다.

이후 이곳이 중구 중심지역으로 개발되면서 동원예식장도 뜯기어 지금은 이 자리에 식당과 노래방이 들어서 있다.

당시 넝마꾼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중 오늘날 울산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 대부분이 과거 생활을 숨기고 싶어 해 취재에 어려움이 많았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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