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천년 기념사업 취지는 좋으나
역사를 자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 부추기는 불신 초래

▲ 홍영진 문화부장

울주군이 올해(2018년)를 울주정명천년으로 정하고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올해가 울주정명천년이라는 건 <고려사> 등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울주군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1018년(고려현종 9)이 울주사(史)에 있어 중요한 해이기에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는 울주정명 기점을 대신 해 그 해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대략적으로라도 울주라는 이름이 생긴 건 언제일까.

<고려사>에는 1018년(현종9)에 ‘울주에 지방관을 파견한다’는 기록과 ‘울주라는 지명이 고려초(정확한 연대는 물론 알 수 없다)에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로부터 7년 전인 1011년(현종2)에는 ‘지금의 흥해 포항 언저리를 거쳐 울주에도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다른 고려사 기록에는 997년(성종16) ‘성종이 경주를 거쳐 흥례부의 대화루(大和樓)에서 잔치를 베풀고 큰 고기를 잡는 것을 구경했다’는 내용도 있다. 흥례부는 울산의 옛 이름 중 하나다.

이에 대해 이종서 울산대 교수는 학술용역에서 ‘국왕과 관련된 기록이라 흥례부가 997년 당시의 공식명칭이었음이 분명하다. 울주 명칭은 997년 이후, 1011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성립했음을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성립 시점은 알 수 없다’고 학술용역에서 밝혔다. 이에 대해 지역 사학계에서는 대부분 수긍하는 기류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송용덕 연구사(고려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초’에 집중한다. ‘고려초’에 대해서는 국내학계의 의견이 분분한데, 이른 시기는 고려초기 지방제도를 정비했던 940년(태조23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울주정명천년으로 불거진 지역사회 논란은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 연도인데다 ‘정명’(혹은 명명)과는 거리가 먼 1018년에 굳이 정명이라는 의미를 갖다붙여 이를 바라보는 시민과 청소년들이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끔 여지를 만든데서 출발한다.

울주군은 즉각 ‘행정적 의미의 정명천년’이라고 해명했다. 학술적으로는 맞지않으나, 울주사의 정체성을 살려 줄 정명기점을 그렇게라도 만들어 지난 천년을 이어 온 것처럼 앞으로 더욱 빛날 새천년을 만들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일각에서도 정명논란을 지적한 본보기사 보도 이후 ‘신청사 시대를 맞아 울주가 새천년 의미를 다지려는데, 꼭 그렇게 딴지부터 걸어야 하느냐’고 점잖게 타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또다른 일각에서는 ‘역사를 자의적으로 적당하게 활용해도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그 것이 공공기관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같은 의견이 수용되는 지역사회 단면이 안타깝다’고 했다.

오해의 여지가 있어 굳이 밝히지만, 울주천년 기념사업 자체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 그 자체로 천년의 빛을 찾아가는 사업으로 확대시켜 나가면 될 것을 논란의 여지가 분명한 억지행정으로 그 취지마저 무색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울주는 조선조 울산이라는 지명이 생기기 전에 지금의 울산을 일컬었던 지명이다. 울산의 옛 지명이 곧 울주라는 이야기다. 어찌보면 울주정명천년은 울주군 만의 사업이 아니라 울산시의 뿌리찾기와도 맞닿아있다. 앞으로 500년 뒤, 또다시 1000년 뒤에도 지역사 재조명은 거듭된다. 그럴 때마다 1018년 울주정명기점은 계속해서 도마에 오를 것이다. 지금이야 행정적 의미의 정명천년이라고 해명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어느 누가 이를 감당해 갈 지 의문이다. 그 귀찮은 과제는 사업을 추진하는 울주군 뿐 아니라 이 사태를 미리 알지못하고 뒤늦은 ‘딴지’로 후회하는 지역언론과 알고도 모르는 채 입다문 지역 향토사학계가 함께 떠맡아야 할 것 같다.

홍영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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