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어르신 한글학교
17명 전교생 모두 80대 이상
맏언니 주남례·우말출 할머니
굳은 손가락·처진 눈꺼풀에도
결석 단한번 없이 개근 열정

▲ 울산 무거제1경로당 ‘도란도란 어르신 한글학교’ 학생인 짓동댁 주남례(96세) 할머니가 한글연습을 하고 있다. 김경우기자

‘도란도란 어르신 한글학교’는 매주 화·목요일마다 울산시 남구 무거제1경로당에서 열린다. 교장 이미영 남구의원, 이흥숙 교감을 비롯한 지도교사 8명은 모두 자원봉사자다. 17명 전교생은 모두 80대 이상 어르신인데 한글을 읽고 쓰는 정도에 따라 1~3학년으로 나뉜다.

그 중 주남례(96)·우말출(94) 할머니는 나이가 많은 큰 언니들. 1년여 시간을 입문과정 1학년반 동급생으로 지내다보니 어느새 단짝이 돼버렸다. 한자 한자 아는 글자가 늘어나는 재미를 공유하며 때로는 서로를 격려하고, 때로는 딴전피우지 못하도록 독려하는 짝지로 지내고 있다.

100세를 앞뒀지만 한글교실 안에서만큼은 ‘가갸거겨’ 외치는 그 시절 ‘초등학교 1학년’이 돼 마냥 설레고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짓동댁’ 주남례 할머니는 울주군 서생면 강월마을이 친정이다. 택호 ‘짓동댁’은 ‘지 살던 동네로 시집갔다’고 해 붙여졌다.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귀염받고 자랐으나,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친정 아버지의 철학이 그만큼 완고했다고. 그래도 한 번 부모님을 졸라보지 그랬냐는 질문에 주 할머니는 모르는 소리 하지도 말라며 손사래부터 쳤다.

“아이고, 학교는 무씬. 울 아버지 그캤다. 여자 속에 글 드가믄 안된다꼬. 그 시절은 다 그래 살았다!”

▲ 100살 앞둔 짓동댁 주남례(96세·왼쪽), 우박댁 우말출(94세) 할머니가 울산시 남구 무거제1경로당 한글교실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우기자

‘우박댁’ 우말출 할머니의 고향은 경주 모화 인근의 우박마을이다. 우씨와 박씨가 많이 사는 그 곳에서 울산으로 시집오자 ‘우박댁’이라는 택호가 주어졌다. 우 할머니는 글공부는 힘들지만 ‘파’ 농사를 짓는데는 선수라고 자랑했다. 날이 풀리면 또다시 신복장에 나가서 대파를 팔 예정이다.

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를 장에서 만나면, 싫다고 거절해도 끝까지 파를 안겨준다. 키울 줄만 알았던 ‘파’는 물론 ‘가지’와 ‘고구마’ ‘보리’까지 온갖 채소와 곡물을 글로 쓸 수 있게 도와줬기 때문이다.

두 할머니의 열정은 지도교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손가락 관절이 굽혀지지 않아 연필을 잡는 손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공책을 내려다보자니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고, 눈물도 흐른다. 책상머리 옆에 항상 손수건을 챙겨둬야 할 정도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결석 없이 개근하고 있다.

아직은 초입 과정이지만 조금 더 노력하면 2학년으로 월반도 가능하다.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간단한 글자에 이어 조만간 ‘딸기’ ‘수박’처럼 받침 딸린 글자에도 도전할 수 있다.

지난 연말에는 90여년 한평생을 살면서 ‘주남례’ ‘우말출’ 난생 처음 본인의 이름 석자까지 써 봤다. 활짝 웃는 얼굴로 “이만하면 출세했제?”하면서 색종이에 쓴 편지까지 보여준다. 지난 연말 방학식을 하면서 지도교사 도움으로 완성한 최초의 가족편지였다.

주 할머니는 편지를 통해 아들 홍순안에게 ‘우짜께나 건강해라’고, 손자 금포에게는 ‘금띠같은 우리 손자, 장가 가서 너무 좋다’고 전했다. 우 할머니의 소원은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들이 건강하게 보내는 것. 색종이 가득 ‘건강’이라는 한 단어를 꼭꼭 눌러쓰며 자신의 소망을 빌고 또 빌었다.

이흥숙 교감은 “어르신들 열정을 보면서 자원봉사자인 우리가 오히려 더 많이 배운다. 100세 시대를 맞아 어르신들의 건강한 도전이 앞으로도 쭉 이어지질 바란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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