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철 울산대 산업경영공학부 교수 전 한국솔베이(주) 상무

불세출의 가객 나훈아가 지구를 다섯바퀴 돈 후 11년 만에 가요계로 컴백, 작년 11월 부산 벡스코에서 71세의 나이로 사회자도 초대가수도 없이 2시간반 동안 죽기 살기로 노래를 불러 관객들을 감동시키며 위트와 유머로 콘서트를 리드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참 거슬러 올라가 필자가 대학 다닐 때 통학거리가 멀어 버스를 갈아타고 다녔는데, 환승지인 부산 충무동의 레코드방에서 나훈아 노래가 흘러나오면 다 듣고 나서 버스를 탈 만큼 열렬한 팬이었다. 그 힘든 시절에 나훈아 노래가 산업화에 따라 고향 땅을 떠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줬던 것 같다.

콘서트 티켓이 약 7분만에 매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티켓 가격도 최고인 가요계의 황제인데도 무대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진행도 명MC를 능가했다. 관객은 부산근처에 거주하는 50대 이상 부부를 모두 모아 놓은 것 같았다. 나훈아가 직접 기획, 연출한 빅 콘서트로 노련한 무대 매너와 특유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십으로 최상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긴 시간 노래를 부르고도 목이 안쉬는 걸 보고 진정한 프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주옥같은 ‘남자의 인생’ 등 신곡 7곡들을 중심으로 과거 희트곡들을 섞어가면서 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좌석을 꽉 매운 관중들이 시종 자리이탈없이 박수치며 화이팅, 앙코르, 오빠, 형님 등을 외쳤다. 말 그대로 드림어게인이었다. 끝에는 여러번 앙코르소리가 끊이지 않아 몇 번이나 퇴장했다가 다시 나와 노래를 한 후 큰 절을 올리며 미안해하는 진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관중들은 콘서트가 다 끝났는데도 떠날 줄 모르고 오랫동안 앙코르와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나훈아는 미성으로 태어난 데다 가사가 깊은 가슴속에 맺혀있는 사연을 묘사하며 한자 한자를 당겼다 밀었다하여 어깨로 리드하는 정통 트로트로 끝없이 올라가면서 비틀고 꺾어서 넘겼다.

나훈아는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나 1966년 20세에 ‘천리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해 타고난 가창력과 자기계발로 취입곡수가 3000여곡이고, 이중 1000여곡을 직접 작사·작곡했으며, 히트곡이 200여곡이나 되는 싱어송라이터 겸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나훈아에겐 유명한 일화도 많다. 유명 정치인이 “나훈아씨도 국회의원 하시지요”에 “그라모 노래는 누가 부르는교?”라며 강한 프로근성을 나타냈다.

이건희 회장의 연회 초대에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서 오라”며 배짱을 보였고, 김일성 주석과 북한 주민들은 애잔한 나훈아 노래를 아주 좋아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 주석과 정상회담이 예정되었을 때 “나훈아와 같이 평양 가서 마음껏 통일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으나 갑작스런 사망으로 불발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기관리를 위해 잘 때도 넥타이를 매고 취침했다는데 나훈아도 개인 콘서트 외에는 나오지 않는 ‘신비마케팅’을 하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는 나훈아의 노래 ‘공’을 듣고 “그 양반 노래를 들어보니 인생을 깊숙이 알고 노래하는구먼”하며 동감했다. 또 명절 때마다 여러 방송사는 앞 다투어 나훈아 특집 쇼를 편성할 만큼 50여년간 최정상을 지킨 살아있는 전설로 독보적인 위상을 누리고 있다.

팬으로서 자주 보지 못해 많이 아쉽지만 신비함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나훈아의 연출력과 마케팅 전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훈아는 무서울 정도로 자신을 컨트롤하며 자신의 가치를 올린다. 응원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팔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목청도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한 10년은 젊어진 기분이고 앞으로 최소한 1년은 스트레스 안받을 것 같다.

산다는 게 별거 없다. 무거운 것 내려놓고 어디에 푹 빠지는 게 제일 편안하고 행복하다.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한 번씩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가는 것도 좋다. 굴곡의 인생사에서 안풀리거나 힘들 땐 노래로 우리의 마음을 달래고 스트레스도 날려 보내자.

박현철 울산대 산업경영공학부 교수 전 한국솔베이(주) 상무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