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수 다담은갤러리 운영위원 전 울산미술협회 사무국장

2017년 12월20일 낯익은 목소리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박 선생 잘 있었나?” “네, 수구형이시네, 잘 지내시지요?” “그래, 자네 작업실 작은 공간 하나 빌려주려므나, 나에게서 공부하던 제자 한사람 나중에 연락 갈거다.” “네 그러지요. 형, 별일 없이 잘 지내시죠?” “그래, 나도 잘 있다.” “추운 날씨 풀리면 언양 장날 얼굴 한 번 뵈요.” “그러자.”

평소 나지막한 목소리와 항상 엷은 미소로 나와 마주하던 수구 선배, 그날 나는 하루 종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품세계를 존경하던 선배와 통화를 하고 난 기분이 흐뭇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고 이번 겨울의 추위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2018년 1월26일. 나에게도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문득 수구 선배가 생각났다. 내일이 언양 장날인데, 같이 국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을까 하고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를 안 받는다. 두세 번 했다. 그래도 안 받는다. 어디 작품에 빠져 전화를 못 받으시겠지. 그래서 메시지를 남겼다. ‘수구형 날씨 춥지요. 감기 조심하시고 날 풀리면 언양 장날 봅시다. 건강 챙기소. 현수.’

다음 날 27일, 언양 장날, 집사람과 함께 국밥 집에서 형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를 안 받는다. 두 세번의 시도 끝에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잔잔한 여자 목소리로 들려왔다. “형수! 수구형 별일 없으시죠.” “네, 그런데 몸에 열이 좀 나서 병원에 계셔요.” 심상찮은 분위기다. “형수, 어느 병원이에요?”

그런데 밝힐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다그쳤다. “열이 심한가요? 형은 몸에 열 나면 안되는데….”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했다. 수구 형님은 평소 지병이 있어 오래 전부터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자신의 작업은 평소 꾸준히 하고 계셨다. 힘 드는 부분은 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작품은 꾸준히 하셨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옥동에 있는 나의 작업실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더블캡 트럭을 몰고 형수님과 함께 오셨다.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나와 마주 한 선배, 나에게 “박 선생 인사해라, 내 안사람이다.” 수구형님은 뒤늦게 재혼하셨다고 한다. 나는 가볍게 인사하고 어설프게 준비한 차 한 잔을 대접했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나 싶다.

나의 다그침에 잔잔하게 들려온 한 마디, “저 사실은요….” 나는 다시 다그치며 물었다. “수구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지요.” “네, 지난 토요일(20일) 보냈어요. 저 세상으로…. 그것도 2일장으로 마쳤어요.” “왜 연락을 안 하셨나요?” “그 분께서 연락을 하지 말랬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었지요. 당신과 소주 마시면서 추억이 있던 사람에게 무어라고 말할까요라고 하니 ‘그 추억을 가슴에 안고 갔다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어요.”

이제 고인이 되신 심수구 화백은 1980년대 이후 척박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활동을 계속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존경했다. 울산화단의 기둥 역할을 하신 그는 내게 네다섯 연배다. 변함없는 가치관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갖고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후배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셨다. 안타깝게도 나는 선배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이렇게 몇 자의 글로 긁적일 수밖에….

박현수 다담은갤러리 운영위원 전 울산미술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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