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사포일기, 커피의 향기(박흥식作(캔버스에 유화, 40호P))작업장이 커피숍에 붙어 있다. 정담을 나누며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때론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위장한 화가일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해본다. 거리에서 그림의 소재를 얻고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野戰 전투병과 같다.

백팩 메고 걸으면 세상이 보인다.
그것을 짊어지면
내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멜빵이 어깨를 파고들 때마다
뼛속까지 작가라고 담금질한다.

안경을 착용하고 안경을 찾은 적이 있었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무엇을 오래 쓰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내 몸처럼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내게는 백팩(backpack)도 그렇다. 나는 외출할 때 습관처럼 백팩을 메고 나선다.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렇게 해오고 있다.

나는 백팩을 5개 정도 갖고 있다. 용도에 따라 주로 실용성 위주로 샀는데도 몇 번 메고 팽개쳐둔 것도 있다. 그중 막냇동생이 선물한 캥거루 마크가 찍힌 것은, 정장을 하고 코트를 입을 때만 멘다. 10여년 전만 해도 50대 후반의 남자가 백팩을 메고 거리를 걷거나 행사장에 들어서면 좀 낯설어 보였다. 서울에서는 중장년층에도 백팩이 빠르게 보급되었으나 지역에서는 크로스 백이 훨씬 자연스러울 때였다. 한번은 크로스 백을 메고 나갔다가 술자리를 옮겨다니는 중에 그걸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함께 있던 M시인이 자신의 차를 몰고 달려가 그 가방을 찾아왔다. 아마 그날 이후일 거다. 나는 백팩만을 애용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백팩은 내 등에 착 달라붙어 어딜 가나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가방 안에 뭐가 들었어요, 선배님?”

배낭을 메고 밤낮없이 쏘다니는 쥐스킨트의 좀머씨처럼 보였던 것일까. 후배 문인이 궁금해 물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꺼내 보여주었다. 소형노트북과 전자책 전용단말기, 어디서든지 인터넷이 가능한 와이파이용 에그, 블루투스용 미니자판과 소형카메라, 아날로그 메모장과 필기도구, 충전용 배터리, 우산, 물병 등등이다. 노트북 대신 태블릿PC가 있을 때도 있지만 그게 그거다. 후배 문인은 싱겁다는 듯 웃었다. 교재만 들어 있으면 대학생 가방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이 사람아, 운전을 하지 않으니 여기 넣고 다닐 수밖에. 그러면서 웃고 말았지만 실은 내게는 절박한 선택이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계실 때였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내와 사흘이 멀다 하고 버스를 타고 어머니를 보러 다녔다. 아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사이 멍청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무료함이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모래처럼 빠져 흘러내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인근의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자판을 두들길 때마다 납덩이 같은 회색의 시간이 금빛으로 살아서 퍼덕거렸다. 조용한 방에서 혼자가 아니면 글이 써지지 않던 내가 젊은이들 틈에 끼여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A4용지 한 장에 압축한 울산’과 ‘경상시론’ 같은 짧은 글들을 워밍업 하면서 소설의 초고를 두들겨댔다.

중용에 능구(能久)라는 말이 나온다. 마음먹은 일을 삼 개월 꾸준하게 하면 그 이후엔 힘들지 않게 흘러간다는 뜻이다. 능구까지는 아니더라도 토막이 난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나름대로 터득했다고나 할까. 이 무렵 오십견을 앓던 아내도 장바구니 대신 백팩을 메기 시작했다.

스마트폰만큼 빠르게 세상은 변화한다.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는 유명인사가 보란 듯이 백팩을 메고 출두한다. 유치원생과 젊은이들, 요즘은 노인들도 백팩을 메고 버스를 타고 거리를 걷는다. 한때 보부상의 등짐이나 스님의 걸망, 우주비행사의 생명유지장치, 군인의 배낭, 학생들의 가방으로만 유용했던 백팩의 진화이다. 백팩을 메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길 위의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백팩을 메고 걸으면 세상이 구석구석까지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갔을 때 바위그림들이 예전보다 훨씬 잘 보였다. 토층전사를 보려고 영도의 동삼동패총전시관에 갔을 때도 그랬다. KTX열차를 타고 달릴 때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공주의 공산성을 오를 때도, 경주 지진 이후 황리단길을 걸을 때, 서악서원의 회화나무를 우러러볼 때도 백팩을 멘 채였다. 최근 별세하신 장모님의 병실에서도 내 곁에 덩그러니 백팩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다시 짊어지면 내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멜빵이 어깨를 파고들 때마다 뼛속까지 작가라고 나를 담금질한다.

소설 ‘스포츠 라이터’와 ‘캐나다’를 쓴 리처드 포드는 “나는 어딜 가든 내 책상을 갖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내가 메고 다니는 백팩이 그렇다. 내가 ‘도스 선생’이라고 부르는 도스토옙스키는, 유형지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선생은 고양이처럼 독하고 끈질긴 천재성을 타고나셨다. 범인인 나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경계에서 헤매는 사람이다. 생각이고 글이고 갈고 닦는 훈련과 노력밖에 달리 재주가 없다. 그래서 늘 읽고 쓰는 도구가 곁에 있어야 한다. 그게 모두 백팩 안에 들어 있다. 오늘도 나는 백팩을 메고 나선다. 백팩이 멈추는 자리가 곧 내 서재이고 작업실이다. 이런 백팩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김옥곤씨
▲ 박흥식씨

■ 김옥곤씨는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미라네 집>
·울산문학상·창릉문학상 수상

■ 박흥식씨는
·1956년 부산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개인전 27회(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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