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 히스토리
5. 울산 남구 (중)선사와 현대의 공존

 

대단위 주거단지·쇼핑가와 함께
선사~현대 수천년의 역사 간직
개관 7주년 맞은 울산박물관 자리
울산역사의 큰 흐름 살펴볼수 있어

울산 남구는 대단위 주거단지와 쇼핑가, 산업단지가 속해 있어 수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울산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남구에도 반구대 암각화 못지않은 선사인의 흔적이 확인될 뿐 아니라 올해로 개관 7주년에 이르는 울산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울산의 어느 기초단체보다 울산역사의 큰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울산박물관은 울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제로 울산의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발자취를 전시한 역사관, 대한민국 산업 수도로서 우뚝 선 현장을 보여주는 산업사관, 울산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의 장인 어린이박물관 등으로 구성되는 울산 문화의 타임머신이자 울산 시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공간이다. 남구소재 각종 유물들은 대부분 이 곳에서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다.

울산 남구소재 국가지정문화재는 보물 3점, 중요민속문화재 2점, 천연기념물 1점 등 6점이 있다. 보물은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보물 제441호)과 이종주 고신왕지 및 이임 무과홍패(보물 제1006호), 자치통감 권226~229(보물 제1281-4호) 3점이다.

중요민속문화재는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鶴城李天機一家墓出土服飾, 중요민속문화재 제37호)과 정공청 유품(鄭公淸遺品, 중요민속문화재 제38호)으로 모두 울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정동에서 발견된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은 학성(울산)이씨 이채석(李埰石)의 11대조인 이천기와 그의 부인 흥려박씨의 합장묘, 그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李之英)과 그의 부인 평해황씨의 합장묘에서 발견됐다. 이 유물은 300여 년 동안 땅속에서 썩지 않고 있다가 1969년에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희귀한 자료로 당시 양반들의 복식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로서 면포 솜소모자, 솜장옷 등 총 10점이다. 정공청 유품은 정공청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투구와 갑옷, 장갑, 혁대, 화살 등의 유품이다.

 

특히 지난 2015년 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골촉 박힌 고래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9년 울산 남구 황성동에서 발견된 이 유물은 신석기시대 유물 포함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수염고래의 어깨뼈에 사슴뼈로 만든 화살촉이 박혀 있어 전국적 관심을 모았다. 골촉이 박힌 부분은 위팔뼈와 결합하는 부분으로 포경 때 배를 탄 상태에서 작살을 던지거나 찔러 공격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따라서 몰이식 포경으로 고래를 공격하거나, 작살잡이가 바다에 들어가 고래가 지쳐 있을 때 가슴지느러미 부분을 찔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신석기시대에도 고래잡이 행위가 인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유물이라는 분석을 낳는다. 이는 곧 울산시 울주군 대곡천변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의 각종 고래잡이 그림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 포경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남구 소재 기념물로 처용암, 개운포성지, 성암동패총은 산업단지와 인접한 곳에 있어 발굴조사가 늦었지만 최근 새롭게 가치가 조명되는 등 새로운 가치복원 노력이 따르는 곳이다. 처용암은 황성동 세죽마을 앞 개운포 가운데에 있으며, 처용랑(處容郞)과 개운포(開雲浦)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성암동 일원의 개운포 성지는 신라 때부터 왜구방어의 요충지로서, 조선 초기에 이곳에 설치된 수군만호(水軍萬戶)의 진영이 세조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의 진영으로 바뀌어 선조 때 동래로 옮겨질 때까지 130여 년 간 중요한 방어기지였다. 성암동패총은 이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의 생활 모습과 당시의 자연환경 등을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습된 유물로는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그물추, 돌고래뼈, 피뿔고동, 참굴, 떡조개 등이 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자료제공= 울산시 남구, 울산박물관

◇남구의 설화

‘무거동 효부각’은 시아버지를 구하려고 호랑이에게 아들을 내어 준 며느리 이야기다. 호랑이가 효심에 감복해 아이를 다시 데려다놓자 마을에 효부각이 세워졌다. 또 신선들의 바둑을 구경하다 돌아오니 증손자가 집을 지키더라는 신선암(神仙巖), 국상이 있으면 선비들이 왕실쪽을 바라보고 곡을 했다는 망제산(望帝山), 한 풍수가가 달동 어귀 갈대를 헤치고 쇠말뚝을 박은 뒤 ‘왕생혈’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