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장광수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 장광수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은 “나눔문화 활성화를 위해 고민하는 지금이 생애 최고의 전성기”라고 말한다. 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

빈농의 자손으로 서러움 많이 겪어
‘남 도울 힘 있었으면…’ 막연히 생각
직장 잡자마자 모교에 장학금, 첫 나눔

라이온스 활동이 기폭제로 작용
현재 아내와 아너 소사이어티 등록
봉사·기부활동에 30억원 이상 내놔

장애인후원회장하며 여러 단체서 찾아
울산공동모금회 회장 맡기에 이르러
마지막 봉사라 생각하며 최선 다해

좌우명은 무심유수…신용 꼭 지켜
‘믿고 일 맡길 사람’으로 인정받아
많은 봉사단체 내게 맡긴 이유일지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활동을 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성공을 최고 가치로 여기던 기업인에서 나눔전도사로 변신, 지금은 나눔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는 장광수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2016년 9월부터 제9대 회장을 맡아 나눔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장 회장은 스스로도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물론 부인 김명언여사까지 동참, 울산의 ‘6호 부부 아너’가 됐다. 결식노인 무료급식, 사랑의 집수리 사업과 같은 봉사활동 및 기부에 30억원 이상을 쓰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고 노력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울산시민대상을 받기도 했다. 건실한 기업인으로도 역량을 인정받았다. 대한전문건설협회 울산광역시회 제3,4대 회장을 맡아 지역건설경제 활성화에 앞장 섰던 그는 “개인에서부터 기업까지 누구나 나눔에 쉽게 참여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나눔문화 확산을 위한 홍보, 그리고 다양한 기부 프로그램 등을 더욱 더 활성화 하기 위해 고민하는 지금이 생애 최고의 전성기”라고 말한다.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사회복지협의회장, 울산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 등 유독 사회·봉사기관단체장으로 인연이 많다.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지.

“빈농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면서 없는 서러움을 많이 겪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을 도울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됐고, 대학졸업 후 사회생활 시작과 함께 실천에 옮겼다. 직장을 잡자마자 봉급을 아껴 모교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나름의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눔의 기쁨을 조금씩 느낀 순간이었다. 그러다 회사를 그만 둘 시점에 시작한 라이온스활동이 기폭제가 됐다. 보다 넒은 의미의 봉사에 대해서 눈을 뜬 것이다. 기업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얻은 성공의 기쁨보다 봉사의 참맛을 알게 됐고, 그 진정성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장애인후원회 회장도 하고 부르미 차도 관리하고 하다보니 봉사단체 여기, 저기서 나를 찾아왔다. 울산사회복지협의회장도 그래서 맡았다.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자리를 잡은 지금이야 누구라도 회장을 맡겠다고 나서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11년간 맡았다. 그렇듯 20년 넘게 봉사하다보니 공동모금회 회장까지 맡기에 이르렀다. 팔순을 앞둔 시점, 마지막 봉사의 기회라는 생각에서 선뜻 수락했다. 그렇지만 할 수록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혹시라도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다.”

-샐러리맨에서 기업인, 나눔전도사로 변신을 거듭해 왔다. 살아온 과정이 궁금하다.

“경북 경산의 빈농에서 태어났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두고 아버지가 내 나이 여섯살때 돌아가셨다. 누나 둘, 여동생은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할 정도로 어려웠다. 시장에서 행상을 했던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들 하나라도 제대로 공부시키려는 마음이 강했다. 누나들의 도움도 컸다. 당시 2개 학급 120명 규모의 시골 초등학교에서 유일하게 나 혼자 대구의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니. 자취생활을 하면서 인근 부잣집 아이들의 가정교사를 했다. 고등학교까지 그렇게 졸업할 수 있었다. 서울로 진학해도 될 정도의 실력은 있었으나 나이 든 어머니를 두고 멀리 떠날 수 없었다. 경북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ROTC 2기로, 학업과 병역을 마치고 첫 직장인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중장비쪽 일을 맡으면서 해외근무가 많았다. 뉴기니아 발전소 건설 현장 등에서 근무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집한채 값을 모았고,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국내 근무를 모색했다. 현대중공업으로 옮겼다. 장비관리과장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수송부장까지 했다. 대리 직급을 달고 옮긴지 5년만에 이룬 성과다. 1989년 직장에서의 경험을 살려 조일중기회사를 창업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곧 바로 전문건설업으로 방향을 바꿨다. 울산에서는 당시 16개 밖에 없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한참 확장되던 시절이라 일감이 많았다. 최고 전성기에는 한해 공사실적이 4000억원 규모에 이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업보다는 사회봉사쪽에 눈을 돌린 지금은 사업규모가 많이 축소됐다. 직원들이 먹고 사는데 지장없을 정도만 유지하고 있다. 회장 직함을 달고 있는 지금은 봉급을 받지 않고 있다. 개인적 성공과 함께 자식들도 비교적 잘 컸으나 더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인생을 정리할 할 시점으로, 남은 여생은 봉사하는데만 신경쓰겠다는 스스로의 다짐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순간은.

“2008년도였던 것 같다. 교통사고로 2년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재울경북대학교 동창회장과 라이온스 회장 등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로, 피로가 쌓이던 때였다. 개인 승용차를 운전해 경주 산내에서 열린 동창회 야유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졸음운전으로 계곡에 추락했다.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죽지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정도였다. 울산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한동안 잘 걷지도 못했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골격이 튼튼해 이겨낼 수 있었다. 지금은 울산 근교의 산을 오르는데 문제없다. 사고전까지만 해도 3000m 이상 산을 다 찾아 다닐 정도였는데. 두번째는 세 아들중 큰 아들을 먼저 보낸 것이다. 현대중공업 소속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일하다 췌장암으로 1년 반 전쯤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좌우명은.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훈도 물흐르듯이 살아가자는 뜻에서 ‘무심유수’로 정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욕얻어 먹을 짓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날 찾고,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일을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였다. 손해보더라도 신용은 지켰다. 일례로 사업 초기 8000만원짜리 공사를 했는데, 800만원 정도의 적자가 났다. 발주처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언반구 내색없이 일했다.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계기로 작용, 연간 4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또 큰 일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수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남이 안하는 일, 어려운 일을 하다 보면 믿음과 신용을 얻게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 사람에게 맡기면 뭐든지 다해낼 것이라는 믿음만 준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많은 봉사단체를 내게 맡긴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태철 논설위원

▲ 장광수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장광수 회장은

1940년생. 경북 경산 출신으로 1976년 울산에 정착했다. 1995년 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해 새울산라이온스클럽 회장, 국제라이온스 355-I 지구총재, 355 복합지구 의장을 역임했다. 2004년는 9월부터 대한전문건설협회 울산광역시회를 맡아 제3,4대 회장으로 지역 건설경제 활성화에 힘썼다. 울산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울산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을 거쳐 지금은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9대 회장을 맡고 있다.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공로상과 울산시민대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울산의 ‘100호 아너 시대’를 열기 위해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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