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미란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연구위원

주말 오후에 서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사회라는 제목을 지닌 다양한 서적들을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은 대체로 현대사회의 문제점과 특성을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서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어느샌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이러한 책의 제목은 혐오사회나 냉소사회, 투명사회, 중독사회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최근에 접한 책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다. 읽으면서 한번쯤은 ‘아니야, 이건 그렇지 않아’라고 반박해 보고 싶은데, 여지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만난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과사회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성과를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라 믿으며, 더욱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 즉, 나는 나를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셈이다. 심지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은 자발적인 것으로, 타인을 착취하는 것보다 더욱 자유롭게, 극심하게 나를 몰아세울 수 있다. 이로 인해 종국에는 스스로를 소진 증후군, 우울증으로 내모는 가해자 겸 피해자가 바로 현대인이라 한다.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으며 나를 착취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러한 일상의 반복으로 몸과 마음의 피로가 한없이 쌓여갈 때쯤, 그로 인해 더 이상 어떠한 성과도 낼 수 없다고 느껴질 때쯤, 그에 대한 초조와 불안으로 나를 탓하고, 또 탓하고, 탓하게 된다.

사람마다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생각과 감정의 흐름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본인의 목표를 위해 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본 적이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소용돌이 안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생각건대 이건 내 탓이 아니다. 물론 당신의 탓도 아니다. 가해자인 나도, 피해자인 나도 모두 ‘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다. 단지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럴 수 있고, 재차 반복하지 않으면 그뿐인 것이라 여기는 편이 낫겠다.

감정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착취했던 가해자인 나를 만난다면 왜 그랬느냐고 따지지 말고, 어리석은 자기 착취를 그만둘 수 있도록 타이르고 안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대로 피로에 내몰린 피해자인 나를 만난다면 본인의 능력 없음을 탓하지 말고, 힘없이 웅크린 그 모습을 탓하지도 말고, 잘 참고 견뎌 왔음을 대견히 여기고 다독여 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꼭 이렇게 얘기해 주자. 세상에는 본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얼마든지 있으며, 상처받은 나를 내가 꼭 안아준다면 언젠가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더하여 세상의 모든 일을 전지전능하게 이뤄낼 능력을 가진 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다독여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라고, 또한 스스로를 다독여 일어선다면 웅크린 타인을 안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사람도 바로 나라고 말이다.

배미란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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