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왕이시여, 하루빨리 좋은 배필을 골라 왕비로 모시옵소서.”

이 말은 아도간이 자신의 딸을 빨리 왕비로 맞으라는 속내였다.

김수로왕이 말했다.

“경들의 뜻은 고맙소만 왕후를 맞이하는 일은 때가 있는 것이니 염려치 마시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배와 말을 준비하게 하고 망산도 바닷가에 나갔다.

일행들이 바다에 다다르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 돛단배가 망산도로 오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처녀가 김수로왕에게 곱게 반절을 하며 말했다.

“저는 이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입니다. 상제로부터 가락국왕에게 가라는 명을 받고 이곳으로 와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반갑소. 나는 공주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이후 왕과 공주는 결혼을 했고,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는 태자 거등을 낳았다.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9명의 왕자를 더 낳아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다.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해 김씨의 시조가 됐으며,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 칠불사에 들어가 수도하다 모두 성불해 일곱 부처가 되었다. 김수로왕은 아들들이 성불한 곳에 대가람을 조성했는데 그곳이 바로 칠불사라는 것이다.

일행은 석가모니불과 함께 목탱화로 모신 김왕광불, 김왕당불, 김왕상불, 김왕행불, 김왕향불, 김왕성불, 김왕공불 일곱 부처에게 숙연하게 참배한 뒤 대웅전을 나왔다.

석공스님이 말했다.

“칠불상 말고도 이 일대는 김수로왕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습니다. 수로왕이 머물렀다는 ‘범왕마을’, 수로왕이 도착했을 때 저자가 섰다 해서 ‘저자골’, 허왕후의 임시 궁궐이 있던 곳은 ‘천비마을’, 어두워질 때 왕후가 당도하여 어름어름했다는 ‘어름골’ 등이 있지요.”

우사가 한탄조로 말했다.

“저는 금관가야의 역사를 기술한 태사령이었습니다. 헌데 김수로왕이 큰 뜻으로 세운 가야가 고구려, 신라, 백제에 침공당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석공스님이 말했다.

“하지대왕을 뵈오니 바람 앞에 촛불같이 꺼져가던 가야에 새 희망이 보입니다. 부디 명림원지를 책사로 모시고 두 분은 마마를 잘 보필해 대가야를 수복하고 가야일통의 대업을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하지왕이 스님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스님, 다음에 뵐 때는 꼭 천축에 간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석공스님은 소이부답으로 합장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석공스님과 헤어진 하지왕이 옷깃을 휘날리며 급히 말을 몰며 우사와 모추에게 말했다.

“빨리 사물국 와룡산으로 가서 명림원지를 뵙도록 합시다.”

 

우리말 어원연구

옷. 【S】uttaria(우타리아), 【E】jacket. 우타리아는 ‘웃도리’와 비슷하다. 갑옷도 우타리아인데 우리가 위에 입어서 윗도리가 아니라 옷에서 윗도리가 나왔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지금도 윗옷과 웃옷은 다른 것으로 구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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