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31)중부도서관과 울산 유학생들

▲ 고원준, 이규정 의원이 1981년 울산·울주대학생 연합회에 보낸 도서관 건립 답변, 울산·울주연합회 학생들은 이 답변이 구체적이지 못하자 1981년 겨울방학 때 울산에 와 시민들을 상대로 도서관건립 캠페인을 벌이다가 울산경찰서에 연행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80년대초 울산·울주대학생연합회서
울산 최초 공공도서관 건립 여론몰이
각계에 건립 취지문·성명서 보냈지만
긍정적 반응에도 구체적 답변 못받아
성남동서 시민상대로 캠페인 벌이다
오흥일 회장 등 경찰서 연행되기도
1984년 8월 북정동에 도서관 들어서

울산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주변 환경 정비작업으로 지난 달 울산중부도서관이 철거됐다. 그러나 울산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이 도서관을 건립하기 위해 1980년대 초 울산 출신의 서울 유학생들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1980년 울산은 공업도시가 된 지 20여년으로 인구가 40여만 명이나 되었지만 이때까지 울산에는 공공도서관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울산 출신 대학생들이 가장 큰 불편을 느꼈다.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울산 출신 고등학교 유학생은 22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시민 숫자에 비해 유학생들이 적었던 것은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대학진학을 위한 수준 높은 고등학교가 없어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둔 중학생들 대부분이 울산보다 교육시설이 좋은 부산과 대구 심지어 마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서울 유학생들 중에는 방학 때면 울산으로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가정적으로 넉넉한 일부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방학 때면 하숙비를 절약하기 위해 울산에 와 방학을 보낸 후 다시 서울로 가는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 유학생들이 울산에 머무는 동안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다. 당시 울산 유일의 도서관이 울산대도서관이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울산대도서관은 울산대학생들이 사용하기에도 공간이 모자라 다른 학교 학생들을 수용할 형편이 못됐다.

이 때문에 서울 유학생들 중 몰래 울산대도서관을 이용하다 쫓겨나면 울산문화원 도서관을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 울산문화원은 3층을 서고 및 도서관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이곳 역시 공간이 좁은데다 문화원 행사가 있을 때는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나와야 할 때가 많았다.

이처럼 도서관이 없어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학생들이 울산에 도서관을 건립하자는데 공감하고 오흥일(현 62세)씨를 울산·울주대학생 연합회 회장으로 선임한 때가 80년대 초다. 이 때 오씨는 연세대 재학 중 군복무를 마치고 휴학 중이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으며 사회경험도 풍부했다.

이 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유학생으로는 연세대 이유동과 동국대 심규박이 있다. 당시 부친이 울산여상 교장이었던 이씨는 현재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심씨는 현재 동국대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유학생들은 먼저 ‘도서관 건립이 시급한 울산’이라는 취지문을 울산 각 기관에 보냈다.

취지문에는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 된지 20여년이 되면서 우리나라 제7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부끄럽게도 울산하면 아직 외부 사람들은 공해도시, 교육부재 도시로 알고 있다. 이런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제 시립도서관을 지어야 할 때가 아닌가. 울산이 공해도시가 된 이면에는 공장주들의 책임이 크다. 공장주들은 이윤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라도 도서관 건립에 협조해야 한다’는 글이 실려 있다.

이 무렵 오씨는 전국 언론사에도 글을 보내었다. 조선일보는 1981년 2월4일자 신문에 ‘공업화 외길 속 유흥가만 즐비한 울산, 도서관 건립 시급하다’는 제목의 오씨 글이 실려 있다. 부산일보도 2월20일자 신문에 ‘인구 40만 울산에 도서관 하나 없다’는 제목의 오씨 글을 실었다.

당시 도서관 건립을 위해 전국 도서관 실태를 둘러보았던 오씨는 “제가 울산에 도서관을 짓기 위해 부산과 대구, 마산, 진주는 물론이고 호남지방까지 방문해 도서관 실태를 알아보았는데 부산과 대구 등 울산 보다 큰 도시는 물론이고 심지어 인구 20여 만이 되지 않는 마산과 진주에도 지역 인사들의 노력으로 도서관이 건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울산의 정치인과 경제인들은 물론이고 지역 유지들까지도 울산에 도서관 건립이 필요하다고 행정부에 건의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울산유학생들은 매년 4월5일 서울 종묘에서 모임을 갖고 지역 발전을 위한 각종 현안을 협의하면서 친목회를 가졌다.

그런데 1981년 종묘에서 열린 모임에서는 울산에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200여명의 학생들이 도서관 건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성명서를 지역 국회의원과 청와대에 보내었다.

이날 모임에서는 또 전국경제인 연합회 회장으로 있던 정주영씨도 찾아가 도서관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지원을 약속받기로 결정했다.

“종묘 모임 후 나를 포함해 대학생 5명이 당시 여의도에 있던 전경련으로 찾아가 정주영 회장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추진위원 중 한명이 울산이 공해도시가 된 것이 현대때문이라는 설명을 정 회장에게 하면서 도서관 건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정 회장이 ‘울산의 공해는 석유화학단지 때문에 발생되는데 현대가 무슨 공해를 유발한다고 그런말을 하느냐’면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도서관 건립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오씨의 회고다.

고원준과 이규정 등 지역 국회의원들도 답변을 보냈다. 이들 역시 ‘울산의 학생들을 위해 도서관 건립이 시급한 사업인 만큼 건립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보내왔다.

청와대에서도 답변이 왔다. 청와대는 업무를 경남도로 이관했으니 경남도로부터 좋은 답변이 있을 것이라는 회신만 왔다.

경남도는 ‘귀 단체에서 대통령 각하께 올린 울산시립도서관 건립 건의서가 본도로 이첩되었기에 다음과 같이 회신합니다’는 답변과 함께 ‘울산시 도서관 건립계획은 울산시의 발전과 여건으로 보아 그 당위성이 인정되어 금년에 부지 2000평을 사기 위해 예산 10억 원이 확보되어 부지를 물색 중에 있으며 연내에 매입토록 되어 있다’는 설명서까지 첨부했다.

답변은 울산시에서도 왔다. 울산시는 도서관 건립을 시 특수사업으로 다목적 시립회관 건립과 함께 시행할 계획이라는 답변을 했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담당 행정부서에서도 답변만 보내었을 뿐 사업시행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가 없어 학생들을 실망시켰다. 답변에 실망한 학생들이 울산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도서관 건립 캠페인을 벌이기로 하고 울산에 온 것이 1982년 겨울 방학 때다.

이들은 캠페인과 함께 시위도 벌이기로 하고 먼저 울산지역 사회단체를 방문했다.

“우리들이 사회단체를 방문한 것은 도서관 건립에 지역 사회 단체들도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는데 대부분의 단체들이 취지는 좋지만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전 울산 JC회장으로 울산여객을 운영하고 있던 김동균씨가 협찬금을 내놓아 이 돈으로 전단지를 만들었다. 또 김석보 울산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이 학생들의 활동을 지지해 전단지에 ‘울산향토문화연구회 후원’이라는 글도 넣었다.

학생들은 시계탑 사거리를 중심으로 성남동과 옥교동을 뛰어다니면서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다. 시민들의 호응은 컸지만 학생들 대부분이 곧 울산경찰서에 연행됐다.

이때만 해도 지방에서 대학생들이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외치면서 데모를 많이 했기 때문에 경찰은 전단지에 쓰인 단어 하나하나를 문제 삼으면서 배후 인물은 없는지 철저히 조사했다.

특히 이 모임의 주동자였던 오씨는 오랫동안 조사를 받았고 부친이 경찰서까지 와 신원보증을 선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런 과정을 거쳐 중구 북정동 등기소 자리에 도서관이 들어선 것이 1984년 8월이다. 처음에는 ‘울산시립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는데 이후 울산에 도서관이 많이 들어서면서 이 도서관은 1988년 ‘울산시립중부도서관’으로 개명됐다.

건립당시 건축면적이 560㎡였던 이 도서관은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1999년에는 3300㎡로 신축되었고 2020년이면 4000㎡의 새로운 중부도서관이 북정동에 다시 들어서게 된다.

당시 도서관 건립을 위해 울산에서 캠페인을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됐던 학생들은 지금은 환갑을 훨씬 넘었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 울산에는 적지 않은 도서관이 건립됐다. 현재 구군에서 운영하는 소형 도서관 외에도 남부, 동부, 울주도서관 등 5개나 되고 멀지 않아 여천동에 중부도서관보다 수십배 큰 울산도서관이 개관된다고하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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