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설날 저녁, 아주 오래된 친구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설날이고 장례식장도 서울 근교라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다음날, 결국 어린 시절 함께 자랐던 친구와 먼 길을 달려갔습니다. 명절 연휴인지라 장례식장은 쓸쓸했고, 와줘서 고맙다는 친구의 쓸쓸한 얼굴도 떠올리며 돌아오는 밤의 고속도로 차안에서 그래도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둠 가득한 차창 밖 풍경을 응시하다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러다 한 지인의 슬픈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지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 날은 주방 싱크대를 정리하는데, 그릇이며, 소쿠리, 쟁반, 결명자, 볶은 보리… 어머니의 흔적들에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다가 결국 조미료통에서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어머니가 자주 가시던 농협마트의 가격표가 찍힌 삼성당(단맛을 내는 식품첨가물)을 발견하곤 결국 한참을 넋 놓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머니를 기억하는 물건들이 계속 나오고 또 더러는 버려야 할텐데 큰일이라며 지금은 미련을 갖고 가져가지만 살면서 아마 그 물건들은 하나하나 버려질 거라고, 그래야지 흐르는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애써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던, 그런 아련한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또, 버리는 걸 너무 잘해서 어떨 땐 필요한 거도 다 버린다는, 짐이 너무 많아서 그때부터 언제든 훌훌 갈 수 있게 다 버린다는, 자신은 딸도 없어서 죽으면 짐 정리해줄 사람이 없어서 버리기 선수라는, 그래서 심하게 장롱도 화장대에도 짐이 없다는, 이번 방학에도 열심히 버릴 거라는, 버리면 속이 좀 시원해진다는 한 지인의 쓸쓸한 이야기도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어쩌면 망각과 이해, 내려놓음… 아마도 이런 것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자신을 토닥이며 지나간 아픈 기억들은 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버리고 잊혀져가고, 끝내 받아들이지 못할 것만 같은 것들도 그런 것이야 하면서 수용하고 이해하는 일. 처음엔 절대 용납될 수 없던 일도 그렇게 살아가면서 내 안에 침수시키는 것. 그래야 그나마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교단에 발을 들여 놓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돌아보면 학생들의 행동이, 타인의 생각들이 그렇게 이해가 안 되고, 미워하고, 화를 내고, 나 자신도 힘들어 하던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 내려놓음, 망각, 이해… 이런 것들에 의지하는 나 자신을 느끼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곤 했습니다.

다가설 내일을 위해 마음은 늘 첫 걸음으로, 그렇게 봄은 견고한 겨울 지나 다시 올 것입니다. 늙고 현명 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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