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하지왕이 우사에게 말했다.

“사물성에 왜구의 침입을 알리지 말란 말이오. 비록 내가 나라도 없이 떠도는 무관의 왕이지만 가야를 생각하면 그건 안 되오. 이건 어명이오. 가려면 모추를 데리고 가시오.”

우사는 하릴 없이 어명을 받들어야 했다. 우사는 하지왕을 사물성 앞 객잔에 머물게 하고 모추와 함께 삿갓을 쓰고 변복을 한 뒤 성문으로 들어갔다.

우사가 보니 사물성 안에서 풍악소리가 울리며 소달구지에 물품과 술동이가 연방 들어가고 있었다. 잔치가 열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사가 사물성으로 쟁과 북을 들고 가는 가척을 잡고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오?”

“사물국 사람이 아니오? 오늘이 우리 주군 소아주의 생일날인 것을 모른단 말이오?”

“전 방금 지리산에서 온 터라 몰랐소이다.”

“금관가야는 망해서 왜국과 대가야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 사물국은 현명한 한기님 덕에 왜와 교역을 해 번성하고 있소이다.”

우사는 속으로 한탄을 했다.

‘강 건너 마을만 나가도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고 마을 약탈하는 왜구들이 득실거리는데 성안은 주지육림에 빠져 있으니 사물국이 망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우사는 사물국의 한기 소아주를 금관가야의 왕 이시품이 소집한 제국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우사는 제국회의의 내용을 기록하는 사관의 신분으로 참가했다. 신라 침공을 결의한 제국회의는 금관성 고당에서 열렸는데 참가한 22개 가야연맹국 한기와 집사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바로 사물국 한기 소아주였다. 소아주는 대가야 집사 박지와 더불어 몇 안 되는 반전파였다. 하지만 주전파인 이시품왕이 소아주에게 뇌물과 미녀를 보내자 주전파로 돌아섰다. 신라와의 전쟁이 벌어져 소집령이 내렸을 때 소아주는 군사보다 처첩을 먼저 챙겨 전장터로 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우사는 가야의 역사서에 엄격한 춘추필법으로 ‘가야연맹이 고구려와 신라에 패한 것은 사물국의 한기와 같은 썩은 군주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참전하였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우사와 모추가 잔치가 열린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고루거각 안에는 소아주 한기와 귀족, 중신들이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고 중앙 무대 위에는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치부만 구술고쟁이로 가린 채 거의 알몸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무희들은 금관가야나 비화가야에서 본 가야 무희가 아니라 왜에서 건너온 기녀들이었다. 춤도 가야춤이 아니라 왜춤이었다.

매미날개 같은 반투명 옷을 입은 왜의 무희들과 기모노를 입은 월희는 일본의 전통 악기인 샤미센 가락에 맞춰 본오도리를 추었다. 물비단 너울을 흔드는 솜씨가 나비처럼 날렵했다.

몸을 뒤틀고 꿈틀거리는 춤사위는 적나라했다.

 

우리말 어원연구

가척: 笳尺, 관에 소속된 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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