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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기획특집인물로 읽는 울산유사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288)]부잣집에 태어나 평생을 부유하게 살았지만 ‘간소한 장례식’ 당부문화예술편 (32)김창식 옹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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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5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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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창식 옹은 평생 부잣집 후손으로 부러움 없이 살았지만 유언에는 번잡한 장례예식과 추모예식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왼편에는 그가 일제강점기 보성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사진이다.

할아버지 김한경때부터 천석꾼 부자로
울산 전역에 많은 전답 소유
서울서 중·고교·전문학교 졸업후
부산 수산대학 거쳐 고향 울산에 정착
학교 교사, 수협, 정치판 등에 헌신
출마는 안했지만 평생 야권에 머물며
선거에 나선 친구·후배들 도와
“공허한 세월…주위에 감사” 짧은 유언
화장후 종교·추모의식 갖지말것 당부


18일 김창식 옹이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흔히들 노인이 숨을 거두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말은 고인의 타계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고인은 2년 전 98세로 영면한 일송 김병희 선생과 함께 울산의 근대사를 가까이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해방 전후 울산의 인물과 이들의 활동을 잘 알았다.

고인과 일송의 차이가 있다면 해방 후 일송이 당시 대부분의 엘리트들이 심취했던 사회주의에 빠져 고생을 한 반면 고인은 울산에 살면서 지식인으로 권력에 기생하는 울산 인물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우익 보수의 길을 지킨 것이라고 하겠다.

울산으로 보면 고인의 영면은 한 시대의 종막을 의미한다. 해방 전 후 울산에는 부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대부분 일본과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고인은 강정마을 천석꾼 후손으로 서울에서 유학을 했던 마지막 부자 세대다.

고인의 집안은 조선 조 말 할아버지 김한경(金翰經) 어른이 살림을 일구어 천석꾼 부자가 되었다. 60년대 초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울산에는 특별한 산업 시설이 없어 부자들의 재산이 대부분 전답이었다.

고인의 집도 울산 전역에 논이 많았다. 두동·두서·청량·범서·농소는 물론이고 우정동 집 앞에도 직접 농사를 지었던 논이 10여 마지기나 되었다. 이들 논에는 지금 청아 예식장과 우정동 제2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논이 많다보니 벼를 저장하는 창고도 두동과 덕하에 있었고 우정동 집에도 200가마니의 쌀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따로 있었다.

일제강점기 집안 어른들이 ‘감평’을 나갈 때는 고인도 따라다녔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전후 소작인들이 농사를 지으면 지주들이 들판으로 나아가 작황을 보고 소작인들로부터 거두어들일 벼의 양을 결정했는데 이것을 ‘감평’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고인의 집이 얼마나 부자였나 하는 것은 당시 강정마을에 있었던 집과 문패에서 알 수 있다. 집은 춘양목으로 강원도에서 목재를 배로 가져와 장생포에 하역한 후 우정동까지 가져왔는데 이때 소달구지 20여대가 동원되었다.

이 무렵에는 조선총독부가 적십자 회비를 많이 거두기 위해 일정액 이상의 적십자 회비를 내는 집에는 아름다운 문양의 문패를 달아주었는데 당시 울산읍내에서 이런 문패를 달았던 집이 만석꾼 김좌성과 고인의 집뿐이었다.

인맥도 좋았다. 삼촌이 둘 있었는데 큰 삼촌 우룡은 국세청 지방청장을 지냈고 작은 삼촌 명룡은 철도청 고위 관료를 역임했다. 12대 울산시장을 지낸 후 나중에 부산시장이 되는 박부찬이 우룡의 사위다. 또 동생 홍식은 육군 대령으로 제대했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울산으로 와 1935년 ‘울산사진연구회’를 만들어 울산 최초의 사진작가가 되었던 정인성이 고인의 외삼촌이었다. 부산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후 80년대 울산KBS 국장을 지냈던 정영모는 고인과 외사촌 간이 된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입학하기 어려운 부산중학을 졸업 한 후 해방 전후 베레모와 마카오 양복을 입고 서양춤을 추면서 당시 울산사람들이 먹기 힘든 초밥을 와사비에 찍어 먹어 울산의 제일 멋쟁이로 알려졌던 박지중이 그의 매형이고 당시 만석꾼으로 울산 최고 부자였던 김좌성의 제일 큰 며느리가 고인의 이모였다.

해방 후 울산여고 교장을 지냈던 손수봉이 그의 고모부였고 육당 최남선의 며느리 이정자는 고인과 이종사촌 간이었다.

고인 역시 중고등학교는 서울에서 유학을 했고 울산에서 교사로 활동할 때는 홍콩에서 들어온 마카오 양복을 입고 멋을 내는 등 부자 할아버지 덕을 톡톡히 보았다.

고인은 울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가 보성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두동면 출신으로 역시 천석꾼의 아들로 6~7대 울산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던 최영근 전 의원이 보성동문으로 한반에서 공부했다. 축구왕 최성곤의 동생 최민곤도 보성 동기다.

당시 서울에서 유학을 하려면 하숙비와 수업료를 합해 한 달 평균 40원 정도가 필요했다. 면서기와 군청서기 월급이 한 달에 20~30원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 돈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보성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고인은 장티푸스로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한 후 서울로 다시 가지 않았다. 대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수산대학인 부산 수산대학을 거쳐 울산으로 왔다.

이후 1949년부터 울산공립농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52년 이 학교가 울산농고와 제일중학교로 분리가 될 때는 중학교에서 물상을 가르쳤다.

수업을 엄격하게 해 ‘호랑이 선생’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고인은 당시 제일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김영칠 선생과 함께 마카오 양복을 입고 다녀 주위 교사들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 마카오 양복은 부산에 가야 맞추어 입을 수 있었는데 양복 한 벌의 값이 교사 6개월 치 월급이 되어 일반 교사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학교생활을 그만 둔 고인은 대학 전공을 살려 잠시 수협에서 근무하다가 보성시절 절친했던 친구 최영근 의원이 1958년 4대 총선에 출마하자 수협을 그만두고 그를 도왔다. 이후 최 의원이 야당의 길을 걷다보니 고인도 자연스럽게 야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울산은 60년대 초 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갑자기 인구가 팽창하다보니 각종 문화단체와 체육단체 그리고 사회단체가 많이 생겨나 각 기관에 사람들이 채용되었는데 이 때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 단체장을 맡을 경우 고인은 그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실제로 울산의 경우 90년대 들어 지방화시대가 시작되면서 각 기관단체장들을 스크린 하는 제도가 생겼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기관 단체장들이 임명제가 되어 자격 없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잦았다.

스스로 선거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평생 야권에 머물렀던 고인이 선거에 개입한 적이 몇 번 있지만 이들 대부분이 친구와 후배들이 출마했을 때 도운 것이다.

그가 평생 손에 놓지 않았던 책이 일본에서 발간되는 월간지 분게이주(文藝春秋)다. 이 책은 1923년 일본에서 발간된 문예지로 일본 문화인들이 즐겨 읽는 책으로 유명하다. 젊은 시절부터 이 책을 즐겨 읽었던 고인은 아흔이 넘어서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책은 나중에 울산대에 기증했다.

그는 말년에도 울산 도심을 활보할 때는 항상 베레모를 쓰고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따라서 고인은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밝았는데 특히 수산대 출신으로 고래에 대한 지식이 많아 고래 관련 글을 여러 번 국내 일간지에 기고했다.

이처럼 평생을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유언은 간단했다. 유언은 지난 연말 작성했는데 숨을 거둘 때까지 3~4번 고쳤다.

고인은 영면하기 얼마 전 의식이 있을 때 장남 태문에게 손가방 하나를 주었다. 가방 속에는 노트 한 권과 영정사진 그리고 노령연금통장이 있었다.

노트에는 “행복하게 살았지만 돌이켜 보면 공허한 92년의 세월이었다”는 유언과 함께 “거듭 말하지만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한 후 장례식 절차도 적어 놓았다.

시신은 화장 후 유골을 뿌리고 장례예식으로 종교의식과 추모의식을 갖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장남 태문은 “부친이 부자집 아들로 살다보니 고집이 세고 매사에 자기중심적이기는 했지만 주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늘 베푸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고인은 교육자 집안의 딸로 1945년 포항여고를 졸업한 후 고인에게 시집을 온 최석린(90)여사 사이에 두 명의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장남 태문은 새누리당 울산시당 사무처장과 UNIST 감사를 지냈고 차남 시홍은 해군 중령으로 예편했다.

사위 추인환은 국세청 고위직에 있었고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윤성준이 주씨의 사위다. 둘째 사위 남궁연은 서울공대 출신으로 국내 굴지의 로봇 회사 한국화낙 대표로 있다. 남씨는 우리나라 4대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던 남궁진의 동생이다. 셋째 사위 정진기는 동아건설부장으로 퇴임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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