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미투운동’
본질은 흐려진채 가십거리 돼선 안돼
범정부차원의 실질적인 대책 나와야

▲ 홍영진 문화부장

한 주부가 밤늦은 귀가길에 두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여자는 방어본능으로 저항하다 그 중 한 청년의 혀를 깨물어 버린다. 여자는 그 청년에게 고소를 당하고, 급기야 구속된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 재판부, 상대편 변호사의 성적·인격적 모욕이 여자를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가 싶더니 어처구니 없게도 여자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집행유예로 풀려나지만 주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포악한 소문, 무엇보다 남편과 가족들의 불신이 여자를 더 짓이긴다. 이를 감수하며 평생을 살아야 하나, 아니면 억울함을 벗기위해 또다시 심판대에 올라야 하나. 두 가지 기로에서 여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다시 시작된 재판에서 그녀는 불행했던 과거가 드러나고 남편과도 멀어지며 급기야 삶의 의욕마저 잃지만 최후 법정에서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시누이의 위증에 대한 번복 증언으로 마침내 원심을 깨고 ‘무죄’을 언도받는다.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1990)의 줄거리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여자는 이런 말을 한다. “재판장님. 만일 또다시 이런 사건이 제게 닥친다면 순순히 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여자들에게 말하겠습니다. 반항하는 것은 안된다고, 얘기하는 것도 안 된다고, 재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입니다.”

무심코 내뱉는 제3자의 한 마디와 무배려·무관심은 가해자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피해자를 두 번 죽인다. 현실의 민낯을 직시하게 만든 영화 속 불편한 진실 앞에서 대부분의 관람객이 치를 떨었다. 30년 전 그 영화를 되돌려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울림이 큰 영화 속 대사를 만들고 다듬는 작업에 최근 각종 언론에 예의 그 가해자로서 가장 많은 의혹을 받고 있는 제왕적 극단 연출가의 이름이 올려져 있다.

지난달 29일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고발 ‘미투’(Me too) 이후 한 달이 흘렀다. 검찰 조직에서 튄 불씨는 문화예술계로 곧바로 번져 문단의 원로, 연극 연출가와 중견배우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이어졌고 성폭행 의혹까지 더해지며 봇물 터지듯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 시사만화가이자 울산 지역 최대 규모 예산을 자랑하는 축제집행위원장도 가해자로 지목돼 관련 행사 일정이 무기한 연기되는 사달이 났다. 들불처럼 일어난 미투는 이처럼 종교와 의료, 학계 등 동시다발로 뻗어가며 동선 반경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다만 어렵사리 이어진 미투 운동이 어느 한 개인의 일탈로 치부되거나 (추정)가해자의 행위 내용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될 까봐 걱정이다. 특히 일부 미디어가 자극적인 피해 내용을 전달하는데 치중하고, 대중의 관음증이 이를 따라가면서 정작 중요한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수한 피해자의 문제로 사안을 축소시켜 어렵사리 용기낸 피해자의 생활을 캐고 신상털이를 하며 인격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동도 염려된다.

이를 예방하고 방지하기 위한 대응책이 나오고는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성폭력과 관련한 집중 민원이 예상되는 예술 분야에 전담 신고상담센터를 설치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부산문화재단은 성폭력 문제에 대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자에 대해 지원이 확정된 사업이라 하더라도 지원을 보류하고, 가해자로 확정될 경우 사업지원 및 심의를 배제한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와 공공기관 중심의 이같은 움직임이 당장 민간 부분까지 확대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나 사회 전반 성폭력 근절을 위한 범정부 협의체가 하루빨리 실질적인 방안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미투 운동과 함께 동시에 추진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온 나라를 들쑤신 이 아픈 경험을 30년 뒤 또다시 앓게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홍영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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