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의병활동으로

29세에 사형판결까지 받아

지난 2012년 건국훈장 추서

외손자가 뒤늦게 확인, 전수

▲ 남진석씨가 외조부 이돈성의 행적과 관련한 옛 문서기록을 앞에두고 그의 의병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의병 활동을 펼치다 사형판결까지 받았던 이돈성(李敦誠·1880~미상).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행적이 제99주년 3·1절(1일)을 맞아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그의 외손인 남진석(68)씨가 국가보훈처의 오래된 자료더미 속에서 외조부로 추정되는 기록을 발견, 잊혀졌던 전적을 뒤늦게라도 지역사회에 알리고자 발벗고 나섰다.

이돈성은 1880년 2월 언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경남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889. 가지산 석남사 아래 살구정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이돈성은 박선익·김기준 등 여러 의병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1908년 3월10일 울산군 내현면 봉월동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3월19일에는 언양읍 순사주재소, 재무서, 우편소 등을 공격, 방화했다. 이후 4월15일에는 울산군 내사리 조봉면으로부터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집했다. 이로 인해 이돈성은 늘 일본 순사들의 감시대상이 됐고, 1909년 5월23일 언양장날 단속 나온 순사에 의해 읍내에서 체포 돼 울산경찰서로 인치됐다.

2달 여 뒤 ‘강도죄’로 기소된 그에게 7월17일 진주지방재판소 부산지부는 교수형을 언도했다. 이에 공소하여 또다시 2달 뒤 대구공소원에서는 종신징역으로 감형된 판결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고, 그 이후 이돈성의 행적은 그만 묘연해 지고 만다. 아내와 9살, 6살, 3살 삼남매는 그가 잡혀들어 간 뒤, 포항과 기장 등 각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돈성의 의병 활동 기록은 보훈처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일본 순사의 수사보고서와 대구고법 판결문 원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보훈처는 이에 따라 그의 공적을 조사·심의했고 지난 2012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남진석씨는 이돈성이 사형 판결을 받을 당시, 불과 9살에 불과했던 어린 딸 이봉순(2008년 별세)의 장남이다. 남씨는 한평생 교육자로 지내다 수년 전 초등교장으로 정년을 맞았는데, 어느 날 보훈처 훈장 미전수자 유공자 명단을 살펴보다 외조부의 이력을 발견하게 됐다. 보훈처 명부의 외조부 이름이 호적과는 다른 한자였으나, 이는 옛 자료를 수기로 여러 번 옮겨 적으며 잘못 기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씨는 외조부가 살던 동네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남씨는 “외조부를 기억하는 동네 어르신들 말씀이 ‘외가에 총이 있었고, 사랑채에 손님이 많이 드나들었으며, 외조부가 오가실 때마다 순사가 감시를 하면서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호적등본과 함께 이같은 구술자료를 모두 모아 이돈성의 외손임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난 연말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드디어 외조부의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외조부의 훈장을 일찍이 타계한 모친 앞에 가장 먼저 바쳤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그의 모친은 아버지 이돈성에 대한 원망 아닌 원망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늦게라도 모친 영전에 훈장을 바쳐 외조부를 기리는 동시에 모친의 넋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며 “앞으로 자료조사를 계속해 외조부의 또다른 행적을 더 세세하게 알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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