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하지왕이 모추와 우사의 욕설을 제지하며 방장에게 말했다.

“방장, 무례를 용서하시오. 헌데 만일 그대가 정말 명림원지가 맞다면 그대의 조상, 명립답부를 잘 알겠구려.”

방장이 하지왕에게 말했다.

“고구려 신대왕 때의 국상 명림답부는 우리 명림가문의 중시조이시고, 동천왕 때 국상 명림어수는 나의 현조가 되시지요. 하지만 나에게 가문은 짐이 될 뿐이오.”

“훌륭한 가문은 영광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요.”

뇌질왕가에서 태어나 가문의 영욕을 경험한 하지왕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조부 때 우리 가문이 역모에 연루돼 집안이 모조리 숙정을 당한 뒤 살기 위해 찾은 땅이 바로 반도의 남쪽 끝인 가야의 사물국이었소. 이후 우리 명림가문은 ‘불가근불가원’이라는 가훈을 정하고 일절 정가에는 나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지요.”

“헌데 방장은 무슨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혀 오랜 세월을 지내고 있는 것이오?”

“원칙은 어기라고 있는 것 아니겠소? 난 가훈을 어기고 사물국에 출사했지요.”

방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명림원지는 와룡산 백천에서 아버지 명림근사와 어머니 소아숙 사이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병치레로 몸이 허약했던 그는 의원과 약방으로 다니면서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나이 일곱에 열병에 걸려 몸이 뒤틀리고 사경을 헤매게 되자 부모는 마지막 수단으로 절을 찾았다. 절의 스님이 아이가 살 수 있는 길은 출가시켜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그 길로 와룡산 백천사에 동자승으로 출가시켰다. 이후 그는 열이 떨어지고 차츰 건강을 회복해 절에서 정진하고 공부해 오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갔다. 이후 명산대찰의 고승을 찾으며 불법을 논했는데 어린 나이의 그를 가르칠 자가 없을 정도로 높은 선지식이 되었다.

석공은 지리산 칠불사에서 동문수학한 도반이었다. 석공은 왜구 침입으로 가족을 잃자 승병으로 출전해 살인계를 범하고 파계해 파락호가 되어 있었다. 그런 석공에게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권유한 자가 바로 명림원지였다. 둘은 중국 종남산에서 금강법사 밑에서 용맹정진하여 약관 19세에 불승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석공은 금강법사의 명을 받아 천축으로 떠났고, 명림원지는 이상에 치우친 불법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 국학에 들어가 공맹의 도인 유가와 한신의 법가, 손오의 병법을 두루 섭렵한 뒤 사물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국에서 온 지식인으로 명성을 떨친 데다 어머니 소아숙의 인척 인연으로 해서 사물국에 황색 조복을 입는 7품 읍차로 출사하게 되었다.

소아주의 형인 한기 소아장은 권력욕은 강하나 암둔하면서도 난폭한 군주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 한기직을 물려받은 그는 동생들을 모두 죽여 아버지와 함께 순장시키고 충언을 하는 충신들도 함께 부왕의 묘에 생매장시켰다. 다만 일찍 출가해 권력에 뜻이 없는 막내 동생 소아주만은 목숨을 살려주고 7품 읍차인 명림원지로 하여금 그의 행동거지를 감시하게 했다.

 

우리말 어원연구

명림답부(明臨答夫, 67~179): 고구려 7대 차대왕을 제거하고, 차대왕의 아우 백고를 신대왕으로 세운 인물. 고구려 최초의 국상으로 뛰어난 지략과 청야전술로 한나라 대군을 물리친 명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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