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1)

▲ 쉐산도 파고다에서 보는 바간

동남아 불교본산으로 성장한 파간왕국
수도 바간도 사원과 탑으로 이루어져
사원과 탑 구분은 내부공간 존재따라
파고다는 동남아 불탑 양식적 원조로
종교시설은 도시의 핵심시설이자 경관
현대 종교시설 도시와 조화 생각케해

황금과 미소의 나라 미얀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마’라는 국호와 ‘랑구운’이라는 수도명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했던 나라다. 그 이름은 식민지배 시절에 영국인들이 지은 것인데 토박이 이름인 ‘미얀마’와 ‘양곤’이 더 낯설다. 우리가 최근까지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대해 유럽 식민주의적 시각에 머물고 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미얀마라는 국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웅산 테러사건이나 군부독재, 로힝야족 탄압 등 매스컴에서 뜬금없이 던져주었던 단편적 뉴스들로부터 동남아시아 저개발국의 모습을 지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곳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도 관광객으로 스쳐지나가는 단편적 인상에 의한 편견으로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십상이다. 목에다 금속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목이 긴 원주민, 타나카라는 하얀 분가루를 바르고 다니는 여인들, 눈이 부실정도로 현란하게 빛나는 황금 탑들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미얀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지도를 펼쳐 벵골만을 찾아야 한다. 인도대륙과 동아시아를 이어주는 호수 같은 바다, 그것은 유럽의 지중해와 같은 바닷길이었다. 인도의 고대문명은 해양 실크로드인 이 바닷길을 건너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그 길은 중원의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까지 이어진 문명의 교통로였다.

그 교차로를 차지하고 있었던 미얀마는 일찍부터 인도문명과 조우해 왔다. 9세기 이곳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던 파간왕국은 이 문명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11세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다. 당시의 수도였던 파간(오늘날의 바간)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종교학 및 언어학, 철학, 약학, 법학 등 전 학문분야를 교육하는 국제도시로 번성하여 인도, 스리랑카, 심지어 크메르 제국에서도 수많은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정신적 지주는 불교신앙이었다. 남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전파된 상좌부 불교(소승불교)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지배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파간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소승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되었다. 심지어 본가였던 스리랑카의 소승불교가 쇠퇴하자 장로를 파견하여 법통을 잇게 하리만큼 동남아 불교의 본산으로 성장했다. 비유하자면 로마제국의 기독교가 비잔틴으로 건너가 새로운 종가를 이룬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 찬란했던 불교문명의 실체적 모습은 천년이 지난 오늘 바간에서 만날 수 있다. 바간은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미얀마의 버마족 통일왕조를 이룩한 파간왕국의 수도였다. 이라와디 강을 끼고 넓게 펼쳐진 바간 평원에 자리 잡고 불교사원과 탑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의 수도를 건설했다.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13세기에 멸망할 때 까지 250년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불교도시를 만들었던 것이다.

쉐산도 파고다에 올라 바간 평원을 바라본다. 옅어지는 아침 안개 사이로 각양각색의 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탑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바라볼수록 늘어간다. 수 십개, 수 백개, 아니 수 천개에 이르기까지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것은 장엄한 탑의 도시, 이보다도 방대한 불교유적은 없으리라. 크기도, 색깔도, 재료도, 형상도 다른 탑들이 열대림과 함께 평원을 수 놓은 풍경은 동영상이 되어 시간과 시각에 따라 변화한다. 그들은 부처의 도시를 꿈꾸며 부처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이곳에서 건축양식의 특징이나 기원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조형물에 내부공간이 있으면 사원이고, 없으면 탑이다. 물론 이들의 탑은 남인도나 스리랑카에 기원을 둔 것이다. 본래 왕릉처럼 거대한 반구형의 모습으로 출발한 스투파는 미얀마에서 점차 원통형으로 진화하게 되고, 위로 갈수록 뾰족해 지면서 종모양의 파고다로 발전했다. 동남아 불탑의 양식적 원조가 된 것이다.

파고다의 기단부에 내부공간을 두면 사원이 된다. 육면체의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안에 동굴형태의 공간을 두어 사원으로 발전시킨 것도 바간 불교건축의 특징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황금 불상과 만날 수 있다. 스투파가 내부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면, 이 탑형 사원에서는 보다 직설적으로 부처를 만나게 한 것이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천불 천탑의 불교도시 바간은 몽골 침략 이후 파간제국의 멸망과 함께 작은 촌락으로 전락해버렸다. 찬란했던 불교유적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도시를 떠났다. 그나마 순례지로 발길을 모으던 유명 사원들마저 1900년대의 대지진으로 허물어져 폐허처럼 변했다. 도시의 모습은 사라지고 탑과 사원의 유적만 남은 불탑의 공동묘지처럼 과거를 증언한다.

찬란했던 불교도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도시와 종교건축의 관계를 생각한다. 근대도시 이전까지 종교건축은 도시의 핵심적 시설이며, 경관이며, 생활양식이었다. 교회나 성당이 없는 유럽의 중세도시를 생각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모스크 없는 이슬람 도시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은 공동체로서 도시의 사회적 자산이며, 정체성이었다.

우리의 종교건축들은 과연 도시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가? 그들은 건축디자인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는가? 뜬금없는 중세유럽식 교회나 조선시대 목조형식의 사찰들은 현대도시 속에서 문화적, 시대적 괴리를 드러낸다. 그것은 주류신앙이 없는 현대도시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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