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34)성세빈·성세륭 형제

▲ 성세빈과 세륭 두 형제는 일제강점기 보성학교를 동구에 설립하는 등 울산을 대표하는 항일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해방 후 굴절된 우리 역사에 묻혀 아직 보훈처의 서훈자 명단에 빠져 있다. 1929년 3월 보성학교 제5회 졸업식에서 세빈(앞줄 가운데)과 세륭(세빈 왼편)형제가 졸업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둘 다 일산진에 큰 어장 경영하며
항일운동 벌이기위해 사회단체 가담
기자로 활동하며 신문지국 운영

세빈, 1938년 보성학교 폐교에 항거
46세로 분사…여운형 선생도 참석
세륭도 ‘독립운동가’ 기록 있어

향토사학자가 공훈서 상신했지만
신간회 활동후 구체적 행적 없다며
형제 둘 다 미서훈자로 남아

최근 들어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세우기 위해 구성된 건립자문위원회가 명부석에 애국지사 이름을 올리는 것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서훈자와 미 서훈자의 명단을 명부석에 넣기로 한 건립자문위원회는 서훈자는 보훈처가 작성한 명단을 그대로 넣으면 되지만 미서훈자는 시각에 따라 논쟁이 많을 수밖에 없어 명단 결정에 어려움을 겪고 힘들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우리 역사는 굴절이 많았고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친일파와 좌익 그리고 보도연맹 등 굴절된 역사를 피해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사회는 이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지금까지 미루어 왔다.

더욱이 우리 정부는 그동안 항일 운동을 열심히 한 인물일지라도 친일파와 좌익은 무조건 서훈에서 빼도록 했다. 서훈을 위해 공훈을 따지고 이들에 대한 기념관을 건립하려 할 때마다 항상 시끄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최근 울산 동구청이 추진하고 있는 보성학교와 성세빈의 재조명은 이런 억울함을 겪었던 성세빈과 동생 성세륭의 행적을 다시 한 번 반추하고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이 사업에는 ‘민주노총 울산본부’와 ‘항일운동터전 보성학교 복원을 위한 시민모임’도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공교롭게도 성세빈과 성세륭 후손들도 최근 이들 조상들의 행적을 기록한 <잊혀진 독립운동가> 책자를 발간했다.

성세빈 형제는 일제강점기 울산을 대표하는 항일운동가다. 이들 형제들은 살았던 지역이 방어진과 가까운 일산진이었고 이곳에서 큰 어장을 운영해 운명적으로 방어진에 살았던 일본인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해방 후 남북이 갈라지는 바람에 그들이 원치 않았던 사상의 늪에 빠져 비극적인 희생자가 되었다.

두 형제가 세운 보성학교는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성세빈·성세륭은 말할 것도 없고 서진문·김천해·박학규·장병준·장기준·천호문·윤덕조·이효정·박두복 등 이 학교를 거쳐 간 교사들의 항일 행적은 그 자체가 울산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사다.

그들의 행적은 김병희와 천재동이 동구 주민들을 상대로 구술로 남기고 일부는 기록으로 정리해 두었다. 우신고등학교 이현호 선생은 이들의 행적을 석사논문으로 제출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도 이들의 행적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친인척들도 아직 많이 살아 있다. 성세빈의 손자 낙진(64)은 할아버지가 살았던 일산진 집을 외롭게 지키고 있고 성세륭의 아들 의영(75)은 남구 옥동에 살면서 아버지의 행적을 더듬고 있다. 서진문 딸 정자 여사는 천재동과 결혼해 부산에 살고 있고 박학규의 손자 진복도 울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장병준과 장기준은 형제였는데 방어진에 살고 있는 장기준의 아들 세령은 아버지가 보성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문을 가르쳤던 옥편을 아직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박두복과 이효정은 부부인데 이들 둘 사이에 난 진수는 몇 해 전 경주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개최 한 후 지금은 부천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성세빈과 세륭 형제는 보성학원 교사로 활동한 것 외에도 닮은 점이 많다.

둘 모두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러 받아 큰 어장을 일산진에서 경영했고 항일운동을 벌이기 위해 사회단체에 가담하고 신문지국을 운영하고 기자로 활동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일단체인 신간회에서는 둘 모두 간부로 일했다. 세빈은 신간회 검사위원장 겸 대표위원과 부회장을 역임했고 세륭은 집행위원과 선전부 간사로 활동했다. 세빈은 울산군청년연맹과 정우회 집행위원, 세륭은 울산청년연맹 사회조사부장을 지냈다.

학력은 차이가 있다. 세빈이 집안 살림을 지키느라고 울산을 떠나지 못해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데 비해 세륭은 집안 일을 형 세빈에게 맡기고 당시로는 지방 학생들의 입학이 쉽지 않은 서울의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교시절 세륭은 만능 스포츠 선수였다. 스키와 마라톤을 잘해 학교별 시합이 열릴 때면 학교 대표 선수로 출전 했다.

일제강점기 이처럼 항일운동을 열심히 했던 이들 형제들이 아직 서훈자가 되지 못한 이면에는 굴절된 우리 역사가 있다.

세빈은 1938년 보성학교 폐교에 항거하다 46세로 분사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민족대표 여운형 선생이 서울에서 울산까지 와 참석했다.

일제에 항거해 민족자본을 지켰고 후진 양성과 보국을 위해 보성학교를 세웠던 세빈은 친일파도 아니었고 좌익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 눈을 감을 때 광복 후 자식들이 애국지사 후손으로 떳떳하게 살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방 후 자식들은 오히려 좌익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세빈은 도영, 덕영, 주영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중 장남 도영은 해방 후 마을 이장으로 있을 때 갑자기 사라진 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가족들은 그가 보도연맹에 가입한 바람에 억울하게 숨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공부했던 덕영은 해방 후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물면서 조총련 간부로 활동했다. 막내 주영은 교사로 있다가 조총련에서 활동하고 있던 덕영에게 의복을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교사 생활을 접고 평생을 어렵게 살아야 했다. 세빈이 아직 서훈자가 되지 못한 것을 이런 자식들의 행적 때문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신간회가 해체될 때 누구보다 앞장서 반대에 앞장섰던 세륭 역시 아직 미서훈자다. 세륭의 막내 의영은 “부친이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독립운동 관련 옥중 기록이 없어 아직 서훈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일산진에 살면서 세륭의 행적을 자세히 지켜보았던 김병희 박사는 그의 자서전 <일송논설집>에서 그가 부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를 회상하면서 “1950년 경 같은 감방에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수감되어 있는 조좌호 교수와 성세륭 선생도 보았는데 조 선생은 훌륭한 학자요 성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는데 그들에게 포상을 못할망정 어떻게 이런 곳에 유치를 시켰는지 수감 이유가 궁금했지만 접근이 힘들어 물어볼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는 해방 후가 되어 독립운동으로 세륭이 구속된 것은 아니겠지만 ‘성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는데’라는 김 박사의 말을 통해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유추할 수 있다.

부끄럽게도 세빈과 세륭 형제들의 이런 항일운동을 처음 찾아내고 보훈처에 이들의 공훈서를 상신한 사람은 울산 사람이 아니고 진주 향토사학자 추경희 씨였다.

그는 1997년 울산지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던 중 두 형제가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열심히 항일운동을 한 것을 발견하고 보훈처에 이들 두 형제들의 항일운동 활동과 함께 서훈을 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보훈처는 세빈의 경우 신간회 활동 후 독립운동 행적이 없다면서 이에 대한 자료 조사를 더 해 다시 올릴 것을 지시했다.

이후 세륭의 아들 의영이 다시 자료를 찾아 나서 소화 5년(1930) 종로경찰서가 본국에 보고한 요시찰 인물 명단 중 조형진과 함께 성세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찾아내고 이 자료를 다시 제출한 상태다.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중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펼쳤던 조씨는 2대 총선 때는 울산 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까지 했지만 6·25때 월북했다. 세륭의 경우도 그가 어릴 때 쓴 항일운동의 글이 발견되어 이를 다시 제출할 계획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행적과 기록은 대부분 정부가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행적과 활동을 독립운동가 가족들과 친인척들이 찾아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독립운동가의 행적과 기록을 찾아내는 일을 보훈처가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행히 세빈과 세륭이 일제강점기 세웠던 보성학교는 터와 이 터에 세웠던 세빈의 송덕비가 아직 그대로 있다. 울산은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지만 이 만큼 독립운동 행적이 확실히 남아 있는 곳도 드물다.

동구청과 보훈처가 이번에 이들 형제들이 남겨 놓은 유적지를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보다 이들 형제들이 서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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