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적 태도로는 권위 인정못받아
모두에 신뢰성 인정받을 실력 갖춰야
세심한 배려까지 더한다면 존경 얻어

▲ 송영승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권위’라는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도 부정적 의미로도 쓰인다. 긍정적 의미의 ‘권위’는 대체로 그 주체가 신뢰할만하거나 충분한 실력을 갖춘 경우에 사용한다. ‘권위 있는 의학잡지’는 유능한 의사가 최고 수준의 논문을 기고하는 잡지이고, ‘물리학계의 권위자’는 물리학에 대한 신뢰할만한 이론가이거나 실력자이다.

반면 부정적 의미의 ‘권위’는 대체로 그 주체가 사회적 지위나 위치에 기초하여 위세를 부리는 경우에 사용한다. ‘권위적인 팀장’은 팀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에 맞추어 팀을 이끄는 사람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이란 상급자가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의 입장만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영어에서도 긍정적 의미의 ‘권위 있는’을 authoritative, 부정적 의미의 ‘권위적인’을 authoritarian이라고 표현하여 두 가지의 의미를 구분한다고 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권위의 이중적 의미를 우리와 같이 느끼는 모양이다.

긍정적 의미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 부정적 의미의 권위를 가지지 않으면, 즉 실력과 신뢰성을 갖춘 사람이 권위적이지 않으면, 존경을 받게 된다.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의미의 권위도 없으면서 부정적 의미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사람을 시쳇말로 ‘꼰대’라고 하며, 그 정도가 심하면 한물간 유행어로 ‘개저씨’로 불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점차 긍정적 의미의 권위를 찾기보다는 지위에 맞는 대우와 같은 부정적 의미의 권위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권위 있는 사람이 탈권위적이기는 쉽지 않고, 어찌 보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긍정적 의미의 권위가 있지만 부정적 의미에서 권위적이지 않은 인물의 예로 기독교의 예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이지만, 그 위치를 내려놓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인생의 가장 나약한 문제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희생당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2000년 동안이나 예수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헌신을 보이는 핵심적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권위를 가졌던 것에 더하여 그가 그 권위를 내려놓고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나약한 죄의 문제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옛날에는 판사가 판사라는 이유만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재판당사자들은 판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판사의 권고에 따라 화해하기도 하였으며, 판사의 조언에 따라 이혼하겠다는 의사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판사의 판단은 재판당사자 뿐만 아니라 재판과 무관한 제3자도 신뢰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런 상황은 상당히 바뀌었고 앞으로 더욱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주권자인 국민은 옛날 권위주의 시대처럼 일정한 지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결정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어찌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겠는가. 판사가 주권자인 국민의 변화된 의식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변화된 국민의 의식에 맞추어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 마땅하다.

앞에 쓴 대로 긍정적 의미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 부정적 의미의 권위를 내려놓으면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컨대 판사의 권위는 판사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뢰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 즉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과 그 결론에 이르는 공정한 절차에서 비롯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재판당사자의 아픔과 어려움을 공감하고 이를 달래주려는 세심한 배려까지 갖춘다면 권위에 더하여 존경과 신뢰까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송영승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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