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차장

1888년 12월23일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인 아를에서는 미술사에 있어 손가락 안에 꼽을만한 유명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가 본인의 귀를 스스로 자른 것이다. 이 사건은 동 시대에 수많은 사건사고에 묻혀갈 뻔 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아를을 넘어 전 세계에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미술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고흐라는 이름을 들으면 이 사건을 기억할 만큼 유명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왜 이렇게 유명한 걸까? 그리고 고흐는 이만큼의 유명세를 증명할 만큼 대단한 인물인걸까?

고흐가 활동하던 시기는 미술사에 있어 격변의 시대였다. 당시 기득권이던 아카데미즘에 대항해 현대미술의 시발점인 인상주의가 꽃피우던 시기다. 하지만 인상주의 또한 한계는 있었다. 현재를 포착하는 데에는 탁월했으나 인간의 내면, 즉 감성을 표현하는 데는 취약했다. 이러던 와중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화풍에 담아내는 화가가 나타났으니 감성에 목말랐던 사람들에게 환영받았음은 당연할 터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본인의 내면을 화풍에 적극적으로 담아낸 화가가 어디 고흐뿐이었겠는가? 그를 특별하게 만든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다시 고흐가 귀를 자른 그날로 돌아가 보자. 고흐는 귀를 자르고 한 여인에게 건넨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여기까지였다면 이 사건은 그저 시골마을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수 있다. 하지만 고흐는 천생 화가였다. 그는 귀를 자른 뒤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것도 여러 점 남겼다. 이것은 그가 처해 있던 감정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이렇듯 고흐는 본인의 고통을 가감 없이 캔버스에 담았고, 우리는 증명할 수 있게 됐다.

이후 고흐의 삶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권총자살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기까지 그의 삶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의 붓은 여전히 꺾이지 않는다.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스스로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고흐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그의 이야기는 전쟁으로 신음하던 20세기 초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위로를 주었고, 표현주의라는 화풍이 성립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20세기 화가들은 억눌렀던 감정들을 본인의 개성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들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가들의 적극적 표현은 이들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우뚝 서게 했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커졌다. 이러한 점을 악용해 나치는 문화예술을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삼았고, 독재정권에서는 탄압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꿋꿋이 스스로를 표현했고, 현재에도 여전하다. 한 예로 최근 활발히 전개되는 예술계의 미투운동 또한 결코 다르지 않다. 혹자는 예술계가 원래 문제가 많아서라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과거로부터 이어온 그들의 정신이 사회의 부조리를 앞장서서 표출한 것이라 본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들이야 말로 예술인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다. 그렇다면 제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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