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하지왕은 수수밥 덩어리를 한입 베어 물었다. 역한 쉰 냄새가 코에서 물씬 풍기고 입에서 수수껍질이 까끌거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꿀꺽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왕의 위엄을 잃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저절로 한숨이 포옥 나왔다. 하지왕은 돌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동안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하지왕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유복자로 태어났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부왕 회령대왕은 광개토태왕에 의해 참수 당했고, 왕비 여옥의 뱃속에 있었던 태아 꺽감은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태왕의 지엄한 명을 받았다. 여옥은 뱃속의 아기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무위로 끝나고 아기는 출산과 동시에 고구려 도독 고상지의 칼에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충신 후누 장군과 수경 부부가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과 바꿔치기해 한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친 뒤에야 꺽감은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꺽감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양부모인 후누 장군과 수경부인의 품에서 자랐다. 하지만 꺽감이 회령왕의 아들이라는 것이 노출되자 신라로 피신해 수경의 외가인 우시산국의 달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쇠를 만드는 달천 철장 쇠부리에서 아름다운 우시산국의 소녀 소라와 함께 철없이 놀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대가야를 지배하고 있던 고상지와 박지가 주색잡기로 국정이 느슨해진 틈을 타 꺽감은 잠시 귀국했으나 다시 고구려의 질자로 뽑혀 양모 수경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광개토태왕과 장화왕후 아래서 격동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양어머니이자 보모인 수경에 의해 친모 여옥왕비가 꺽감을 낳은 뒤 국내성으로 끌려가 광개토태왕의 소후가 된 사실을 알았고, 꺽감과 여옥은 처음으로 감격적인 모자상봉을 할 수 있었다.

꺽감은 고구려 태학에 입학해 신라, 백제, 왜, 숙신, 후연 등 각 나라에서 끌려온 질자들과 함께 경쟁하며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무엇보다도 광개토태왕의 특별한 배려로 태왕으로부터 태자 거련과 함께 제왕학을 배운 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사서오경과 고구려사, 병법과 무술은 태학의 박사와 교수들로부터 배웠다. 하지만 실제 관료를 움직여 국가를 경영하고 신출귀몰한 병법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광개토태왕으로부터 거련과 함께 제왕학을 배은 것은 꺽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 와중에 거련태자와 그의 누이동생 상희, 백제공주 다희와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면서 인연을 쌓은 것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지금은 신라왕이 된, 질자의 맏형 실성군과의 만남은 꺽감이 고구려인이 아니라 가야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꺽감은 질자생활을 하면서 머리가 굵어지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며 부쩍 성장했다.

그러나 박지 집사의 밀고로 질자생활은 위기에 빠졌다. 박지는 꺽감이 소후 여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장화황후에게 알렸고, 여옥을 질투하던 장화왕후는 이 사실을 광개토태왕에게 알려 왕명을 거역한 꺽감과 여옥, 수경을 죽이려고 했다.

그 때 한반도에 큰 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백제 아신왕의 꼬드김에 넘어가 금관가야의 이시품왕이 가야연맹군과 왜의 용병을 이끌고 신라의 서라벌로 쳐들어간 것이다.

 

우리말 어원연구

쇠. 【S】sena(세나), senai(세나이). 【E】iron. 산스크리트어 ‘sena’(세나)는 우리말 ‘세다’ ‘사나이’와 어원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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