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금관가야의 신라 침공에 다급해진 내물왕은 즉시 상국인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정에 나서 서라벌을 점령하고 있던 이시품왕을 물리치고 감옥에 갇혀 있던 내물왕을 구출했다.

태왕은 그에 그치지 않고 임나왜소가 설치된 종발성까지 밀고 내려가 임나왜소를 멸하고 성에 농성하고 있던 금관가야왕 이시품왕과 백제장군 목라근자를 포로로 잡았다. 태왕은 금관가야를 아라가야의 왕에게 위임통치하고 포로로 잡은 이시품왕과 목라근자를 평양으로 끌고 갔다.

여가전쟁의 결과,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연맹체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침공으로 사실상 와해되었다. 가야연맹체 22개국 중 낙동 동북쪽의 6가야는 신라 내물왕에게 빼앗기고, 소백산맥 서쪽의 6가야와 대가야는 백제 아신왕에게 빼앗겼으며, 대왜 무역창구였던 종발성의 임나왜소는 없어져 대마도로 옮겨져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남은 9가야마저 고구려와 신라, 백제와 왜의 침공과 간섭 하에 실낱같은 가야의 국맥조차 끊어질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여가전쟁에서 대승했으나 고구려군의 남정을 틈타 국내성으로 침입한 후연의 모용성을 치기 위해 태왕은 급히 평양으로 귀환했다. 평양에서 광개토태왕은 꺽감과 소후, 수경을 죽이라는 장화왕후의 강청을 물리치고 오히려 소후 여옥의 원청을 들어 그들을 고향인 대가야로 돌려보냈다.

꺽감이 고향으로 돌아오니 대가야는 백제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백제장군 목만치가 고상지 도독과 후누 장군을 물리치고 대가야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만치는 친고구려계인 박지 집사 대신 친백제계 염사치를 집사로 등용해 국방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꺽감이 돌아오자 대가야 부흥군은 활기를 띠었다. 그동안 후누 장군은 가야산에서 대가야 부흥군을 조직하고 군사력으로 대가야 회복을 노렸으나 여의치 않았다. 대가야에서 도망친 박지 집사는 화려한 외교술로 광개토태왕으로부터 포로 목라근자를 넘겨받아 그의 아들 목만치와 협상했다. 주전파인 후누 장군이 대가야로 쳐들어가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가운데 협상파인 박지 집사는 목만치와 협상을 벌여 목라근자를 넘겨주는 대가로 어라성을 돌려받는 것으로 아퀴지어 마침내 대가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박지 집사의 외교술과 후누 장군의 군사력에 의해 대가야로 귀환한 꺽감은 열두 살에 대가야의 왕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나라는 어머니 여옥왕비의 섭정 아래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박지와 후누는 섭정 여옥왕비를 둘러싸고 서로 건국의 공을 다투었다. 처음에는 박지가 환관 근대를 왕비에 침전에 보내고 후누 일파를 숙청하면서 앞서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후누의 부인, 수경이 왕비를 움직여 박지의 부패와 국정농단을 사정하자 위기에 몰린 박지는 고구려 장화왕후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대가야의 내홍은 극에 달했다. 결국 박지 집사는 하지왕이 태사령 우사와 함께 금관가야로 간 틈을 타, 신라장군 석달곤을 불러들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섭정 여옥은 별궁에 유폐되고 후누 장군은 뇌옥에 갇혔으며 하지왕은 역적과 현상금의 딱지가 붙어 정처 없는 도피 길에 올랐다.

 

우리말 어원연구

잡다. 【S】jabhda(자브흐다), 【E】arrest. ‘사로잡다’의 산스크리트어는 ‘sarojabhda(사로자브흐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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