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중반 간송 엄대섭(중간) 선생이 경주시립도서관 관장으로 있을 때 외국인으로부터 마을문고 책장을 전달받으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간송, 1921년 울주군 웅촌서 태어나
어릴적 일본서 생활하다 해방후 귀국
1951년부터 마을문고사업 시작

자신의 책으로 무료도서관 열고
먼곳엔 책 보내는 순회문고도 운영
1980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받은 상금으로 간송도서관상 제정

1967년 정부 지원 끊겨 어려움 겪자
이후락 찾아 이사장직 부탁, 수락받아
1970년 주일대사로 갈때까지 육성시켜

오는 4월26일 개관하는 울산도서관이 개관기념사업으로 간송 엄대섭 기념전을 준비하고 있다.

간송은 마을문고를 만들고 도서관 설립운동을 펼친 농촌 운동가로 1921년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에서 출생했다. 가정 경제가 어려워 일제강점기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던 그는 해방 후 귀국해 1951년부터 마을문고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쟁 중이라 책을 구하기가 힘들었을 뿐 아니라 먹고 사는데 바빠 독서를 할 겨를이 없었다.

간송은 이 무렵 자신이 갖고 있던 3000여 권의 책으로 울산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무료도서관을 열었다. 그는 책장을 만들 형편이 못되어 군인들이 버리고 간 탄약상자에 책을 담아놓고 이웃주민들이 와서 읽도록 하고 먼 곳에는 책을 보내어 독서를 하는 순회문고를 운영했다.

마을문고운동을 할 때는 생업을 걱정해 부인부터 반대했고 주위 사람들도 천시했지만 간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1980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이 때 받은 상금 5만달러로 1986년 ‘간송도서관상’을 제정해 매년 책 읽기 운동에 참여하고 도서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수여했다. 이처럼 평생을 독서운동에 바친 그는 ‘마을문고운동의 창시자’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그가 이처럼 마을문고운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우석 이후락을 비롯해 고기업, 고태진, 정택락 그리고 김제원, 김창원 형제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마을문고운동은 1962년부터 정부지원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확대가 되었다. 이 무렵 정부는 마을문고 사업을 농어촌 사회 교육정책으로 지정한 후 보조금을 지급했다. 또 1963년에는 농촌진흥청 수협중앙회가 농촌 지도사업으로 그리고 1966년에는 내무부가 지방자치단체의 기반 행정사업으로 이 운동을 채택하면서 재정지원을 해 전국적인 규모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1967년 정부는 갑자기 마을문고를 비롯한 정부 지원 민간사업에 대해 자체적인 재정자립 강화차원에서 지원금을 끊었다. 이러다보니 당시 마을문고는 회원이 전국적으로 25만여 명이나 되었지만 재정이 어려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간송이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은 인물이 당시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간송은 우석에게 마을문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마을문고 이사장직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고 이를 우석이 수락해 우석은 마을문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마을문고가 급성장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다. 당시 우석이 간송의 요청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간송이 우석의 고향인 웅촌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간송의 마을문고 설립취지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우석이 마을문고에 얼마나 열정을 쏟았나 하는 것은 마을문고에 참여했던 인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우석은 이사장이 된 후 당시 제일은행 전무였던 고태진과 서정귀 호남정유 사장,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을 각각 이사로 선임하고 정태락 대한통운 부사장을 감사에 앉혔다.

이후 우석은 1970년 주일대사로 갈 때까지 마을문고를 키웠다. 당시 서울에서 우석과 함께 간송을 만났던 최종두(79) 시인의 얘기다.

“60년대 후반 경 저와 김영호 ‘청수회’ 회장이 업무를 보고 차 서울로 가 우석 선생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석 선생이 ‘오늘 훌륭한 고향 사람을 만나니 같이 가자’고 해 간 곳이 중구 청진동에 있던 할매집 추어탕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니 대한통운의 정택락 부사장과 함께 귀공자처럼 생긴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엄대섭씨였습니다. 이날 엄씨는 우석에게 마을문고 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양지회’에서 이 운동을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이를 육영수 여사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우석에게 했습니다.”

‘양지회’는 당시 육영수 여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사회봉사 단체였다. 이후 ‘양지회’는 마을문고 사업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해 농어촌에 책 보내기 운동을 벌여 마을문고가 더욱 활성화 되었다.

1970년 우석이 청와대를 나와 주일 대사로 가면서 마을문고 이사장은 김제원 당시 경향신문 사장으로 바뀌었다. 김 사장이 제2대 마을문고 이사장이 된 것은 우석의 권유 때문이었지만 그가 마을문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석의 동생 거락을 통해서다. 거락이 남대문 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간송은 마을문고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거락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특히 우석에게 마을문고 일을 부탁할 때는 우석이 바빠 직접 만나기가 힘들어 거락을 통해 의사를 전할 때가 많았다.

이무렵 거락의 집을 자주 들었던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제원의 동생 창원이었다. 창원은 당시 부산 전포동에 신진자동차 회사를 차려 놓고 마이크로버스를 만들 때였기 때문에 우석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창원 역시 우석을 직접 만나는 것이 힘들어 거락을 통해 우석의 도움을 받았다. 이 무렵 거락은 창원에게 간송이 추진하고 있는 마을문고 사업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당시 창원이 공이일로 바빴기 때문에 그의 형 제원에게 이 일을 당부해 제원이 이사장직을 맡았다. 우석의 조카 동휘(69)씨의 회고다.

“70년대 초 부친이 남대문 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간송은 한 달에 적어도 3~4번은 우리 집으로 와 부친과 마을문고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그 때 창원씨도 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어 셋이 환담을 나눌 때가 많았는데 그 때 부친이 창원씨에게 마을문고 취지가 좋다면서 도와주라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우석과 이런 인연으로 창원은 나중에 우석이 울산대학교를 설립할 때는 이사가 되고 정주영과 함께 거금 2500만 원을 내어놓았다. 1975년 2월에는 우석의 금고 지기로 조흥은행장이었던 고태진이 제3대 마을문고 이사장직을 맡았다. 고씨가 이사장이 된 것 역시 우석의 권유 때문이었다. 고씨는 이사장 취임 한 달 뒤 ‘마을문고 창립 15주년’ 행사로 조흥은행 본점에서 ‘전국 마을 문고 지도자대회’를 열었다. 이해 9월에는 ‘제21회 독서주간’을 맞아 마을문고 책 늘리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직접 실무를 챙기기도 했다.

이 무렵 간송은 울산 중구 북정동에 있던 고태진의 부친 고기업 집도 자주 드나들었다. 해방 후 울산읍장을 지내고 울산상공회의소를 설립했던 고기업은 당시 울산 유지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울산 양조장을 운영해 돈이 많았다. 고태진의 아들 동원(74)씨의 회고다.

“부친이 조흥은행장으로 있던 70년대 중반 간송 선생이 일 년에 2~3번은 서울에서 울산으로 와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당시 간송은 마을문고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할아버지를 자주 만났는데 할아버지는 간송이 오면 항상 이복락 어른을 불러 3명이 마을문고 지원 문제를 협의한 후 간송이 갈 때는 많은 돈을 주곤했습니다.”

고씨는 또 “간송이 어린 시절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할아버지와 이복락 어른과 한자리에서 얘기를 나눌 때도 예의가 아주 발랐다”고 말한다.

우석의 먼 인척인 이복락은 고태진과 울산초등학교 동기동창으로 당시 고기업은 양조장 운영을 비롯한 중요한 집안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이씨와 협의했다. 울산광역시의회 초대 부의장을 지냈던 이수만씨가 그의 아들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처럼 독서운동과 도서관 운영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간송에게 2004년 정부는 문화예술발전 유공자로 선정하고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평소 척추가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던 간송은 1987년에는 아들이 의사로 있던 미국으로 가 이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2009년 2월 89세로 영면했다.

요즘도 우리 농어촌 어디를 가도 마을문고를 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헌신적으로 마을문고 운동을 벌였던 간송의 덕분이다.

이번에 열리는 ‘엄대섭 기념전’이 마을문고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간송을 추모하고 또 그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울산사람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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