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국상 명림답부가 입을 열었다.

“마마, 국가의 존망이 조당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이 무거운 결정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리이까. 지금 후한은 나라가 크고 병사가 많은데다 질풍노도로 달려와 사기가 충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병사는 적고 나라는 어수선합니다. 섣불리 나가 싸워 패하기라도 하면 한순간에 추모대왕이 세운 고구려 사직이 멸망하고 맙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말은 맞소. 하지만 싸우지도 않고 화의도 하지 말자니 그냥 가만히 있자는 것이오?”

“마마,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문무백관들이 혀끝을 차거나 끌탕을 치며 명림답부를 비난했다.

명림답부가 말했다.

“요동 벌로 달려가지 말고 성을 지키며 방어하자는 것입니다. 군사가 많으면 나아가 싸우고, 적으면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적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천리 원정을 왔으므로 우리에게 다가올수록 보급로는 뱀처럼 길어집니다. 그러면 양식 운반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적은 지치게 됩니다.”

“……”

“다만 우리가 요동 벌에는 기마대를 보내지 말고 농부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전쟁에 농부를 내보내라니.”

“성벽은 높게 쌓고, 들판은 비워야 합니다. 농부들을 들판을 보내 낫으로 들의 곡식들을 모두 베어 성안으로 거둬들이면 적은 굶주리고 발붙일 곳이 없어 지쳐 철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군사를 내보내 싸우면 적들을 크게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호, 그것 좋은 계책이오.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대신들은 무조건 나가서 싸우자고만 할 뿐 명림답부의 전술만한 것을 내놓지 못했으므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왕은 명림답부의 작전에 동의하고 그에게 병권 일체를 맡겼다.

고구려는 후한의 대군과 맞서 싸우지 않고, 성에 들어가 철저하게 지키기를 거듭했다. 다만 소수의 척후병을 내어 유인하고 별동대로 기습, 매복을 해 적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후한의 군사들은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피로감이 쌓여갔고, 차츰 식량마저 부족해져 사기가 떨어진데다 고구려의 별동대가 밤낮으로 등에처럼 괴롭히니 견디지를 못하였다. 지쳐떨어진 후한의 대군은 번번이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잔병이 되어 철군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를 이때를 노렸다. 그는 자신이 직접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후한의 군대를 뒤쫓아 좌원이란 곳에서 전투를 벌여 적을 전멸시켰다. 좌원에서 후한의 군대는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대패했다. 신대왕은 나라를 구한 명림답부를 맞이하기 위해 십리 밖으로 나와 환영했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의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우리말 어원연구
건벽청야(建壁淸野): 손자병법에 나온 전술개념.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한 인물로 612년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대첩에서 물리 친 을지문덕 장군이 있다. 하지만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에 청야라는 말은 없다. 을지문덕보다 먼저 청야 작전을 실행한 인물이 바로 명림답부였다. 그의 청야 작전이 훗날 을지문덕의 작전 수행에 모델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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