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그림 이상열

후한과의 전쟁 승리로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자가 되어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명림답부는 국가적 영웅이 됨과 동시에 부와 권력도 자연히 뒤따르게 되었다. 그가 후연의 군대를 전멸시킨 좌원과 질산 일대를 식읍으로 받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자신의 부족 연나부를 고구려왕실과 혼인을 통해 권력을 강화시켰다. 연나부 출신 우소의 딸은 신대왕의 장남인 남무와 결혼했고, 남무는 9대 고국천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대대로 왕비는 연나부 출신이었다.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까지 모두 연나부 출신 왕비를 배출했다.

명립답부가 권력을 쥔 이후로, 백년 이상 연나부는 거듭해서 왕비를 배출하여 왕실인 계루부에 버금가는 큰 세력을 갖게 되었다. 반면 명림답부가 시해한 차대왕을 지지했던 관나부와 환나부는 급격히 몰락해서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명림답부는 언제든 폭군은 제거할 수 있다는 왕권교체의 정당성을 부여했고, 최초의 국상제도 도입을 통해 국무체제를 정비했으며, 외적을 물리치고 그 병법마저 제시함으로써 후대 국가방위의 전범이 되었다. 고구려는 그의 등장 전후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구도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명림답부는 그의 가문에도 영향력을 끼쳐, 후손인 명림어수는 동천왕 시절에 국상이 되었고, 명림홀도는 중천왕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왕은 고구려 질자 시절, 태학에서 박사로부터 고구려 역사를 배우면서 명림답부야말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스로 몸을 일으켜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르고 나라를 구한 사국 최고의 전략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말은 허황된 듯하고 외모는 볼품없어도 명림답부의 피가 흐르고, 명림가의 가풍을 물려받은 명림원지도 최고의 전략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사물가야의 폭군 한기인 소아장을 죽이고 현재 소아주를 등극시킨 자이다. 다만 이후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지금 옥중에 갇혀 있지만 역사와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은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특이한 데가 있다.’

뇌옥 바깥에서는 장맛비가 계속 내렸다. 오늘도 비 때문에 바깥 작업장에 노역을 나가지 못한 죄수들은 어두컴컴한 동굴뇌옥에서 이나 빈대를 잡으며 잡담을 나누거나 고누, 밤윷, 팔씨름 따위를 하고 있었다. 입구 쪽 방에서는 제법 큰 싸움이 나 우당당탕 소리가 나고 욕설이 오갔다. 사람들이 좁은 데서 할 일 없이 앉아 있으면 짜증이 나고 별 이유 없이 싸움이 나기 마련이다. 개털과 범털 두 놈이 개의 자지 속에 박혀 있는 심이 ‘뼈다’ ‘아니다 힘줄이다’며 서로 우기다가 개 같은 놈이라는 욕설이 튀어나오고 종내는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연일 내리는 비로 사형집행이 미뤄줘 생명이 연장되고 있음을 가야의 천신 이비가지에게 감사드리고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하지왕은 다시 목창살을 사이에 두고 명림원지와 마주 앉았다.

하지왕이 명림원지에게 물었다.

“와륵선생, 그러면 진정 천하일통의 대업을 이룬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말 어원연구
사국(四國):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를 말한다.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게 멸망하기까지 한반도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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