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39)최형우와 최예(崔汭)

▲ 최근 고향인 울주군 서생면을 찾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사성공파 재실 모운재 상량식에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등 참석
문중 출신 유명인 새긴 비도 세워
두서면 출신 울산문사 최예 선생
조선시대 학문으로 입신한 문사로
울산의 귀한 문화자산임 기억해야

지난 7일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의 고향인 울주군 서생면 위양리에서는 경주 최씨 사성공파 재실인 모운재(慕雲齋) 상량식이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사성공파 시조 최고운의 31세손인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도 참석했다.

최 전 장관은 원영일 여사와 함께 일찍 재실에 나타나 재실을 찾는 손님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최 전 장관은 건강이 좋지 않아 주로 재실 안에서 손님을 맞고 환담을 나누었다.

이날 행사는 최 전 장관의 개인적인 행사가 아닌 문중 행사였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었다.

최 전 장관은 자신이 권좌에 있는 동안 자신의 고향인 서생에 지인들을 불러놓고 신년 인사회를 매년 가졌다. 당시 마을에 가 보면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울산은 물론이고 멀리 서울과 부산에서도 구름처럼 모여들어 이들이 타고 온 차를 정리하느라고 마을 입구부터 교통경찰관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나 이날은 문중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윤시철 시의장과 허령 시의원이 행사 전에 왔다갔을 뿐, 사람들이 없어 재실 앞 거리에도 주차된 차량이 많지 않았다.

특히 울산 재야인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상량식 자체가 쓸쓸한 느낌이었다. 최 전 장관은 내무부 장관으로 있던 시절 울산광역시 승격을 주도했다. 이때만 해도 울산에는 최 전 장관과 인연을 앞세우는 국회의원과 시군의원들 그리고 야당 인사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최 전 장관을 ‘의형제 사이’라고 얘기한 사람이 있었나 하면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또 최 전 장관이 ‘식구’나 마찬가지라면서 최 전 장관과 교분을 자랑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또 이들 중에는 당시 최 전 장관이 살았던 서울 구기동 집을 다녀온 얘기를 하면서 광역시 승격에 자신이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자랑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이 세월이 갈수록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고향 찾기가 힘든 점을 감안해 이번에는 울산에서 좀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동안 뵙지 못한 지인들을 만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장에서 최 전 장관이 가장 기쁘게 맞이한 인물이 전규열 ‘울산야당 동지회’ 회장이었다. 전 회장은 8대 총선에서 최 전 장관과 인연을 맺은 후 선거 때마다 그를 도우면서 지금까지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

전 회장을 본 최 전 장관은 오열을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전 회장은 “최 전 장관이 최근 들어 눈물이 많아져 안부 전화만 걸어도 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원 여사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날도 원 여사는 온 종일 최 전 장관 곁에서 그를 돌보았다. 이날 원 여사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고 재실 계단을 오르내릴 때가 잦았는데 이때마다 무릎에 통증이 온다면서 몸을 옆으로 해 계단을 오르내렸다.

원 여사는 “그동안 불편한 남편을 보살피느라고 나 자신이 아픈 줄 몰랐는데 최근에는 나 스스로 몸이 많이 쇠약해 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면서 “남편이 돌아갈 때까지는 내가 아파서는 안되는데”라면서 걱정을 했다.

원 여사는 특별히 전 회장과 인연이 깊다. 전 회장은 고향이 두서면 척과리로 두동과 두서 지역에 친인척을 비롯한 지인들이 많았다. 따라서 원 여사는 울산에서 최 전 장관이 출마했던 8대 총선 때부터 12대 총선 때까지 전 회장과 울주군의 농촌 지역을 함께 돌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원 여사는 이날 재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규열 회장은 올 곧은 야당정치인으로 최 장관을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최 장관 곁을 떠나지 않아 지금은 가족보다 더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말했다.

화환도 많았지만 대부분 문중 관련 단체에서 보낸 것이지 정치인들의 화환은 없었다. 원 여사는 울산에 오기 전 서울에서 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행사장에 올 것으로 예상되는 야당 인사들을 거명하면서 “이들이 이미 나이가 들고 차가 없어 행사장에 오는 자체가 힘들 것”이라면서 걱정했다. 그러나 원 여사가 거명한 사람들 중에도 행사장에 얼굴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

문중은 이번 행사를 하면서 문중 출신의 유명인들 비도 재실 입구에 세웠다. 비에는 참찬관(參贊官) 최주철(崔珠哲), 통정대부(通政大夫) 최영두(崔英斗), 가선대부(嘉善大夫) 최현철(崔鉉喆),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 최형우(崔炯佑) 이름을 함께 새겨 넣고 이들의 행적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주철 공은 최 고운의 23세 손으로 조선 숙종 때 경연청(經筳廳) 참찬관으로 임금께 경사를 가르치고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 대동법을 확대 실시했던 인물로 소개가 되어 있었다. 영두는 27세 손으로 조선 고종 때 절충장군으로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를 철통 방어한 정통무관으로 기록해 놓았다.

현철은 28세손으로 조선 고종 때 규장각에서 제학으로 있으면서 <일성록>을 편집하고 체계적인 학문을 수립보전 하는 등 근대 도서관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새겨 놓았다.

최 전 장관은 31세손으로 대한민국 제58대 내무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 지방자치의 기초를 마련했고 울산과 부산에서 6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대한민국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신라 6부촌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주 최씨 문중은 그동안 고운 최치원, 정무공 최진립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경주 최씨의 사성공파 문중이 이들과 함께 자랑하는 울산문사가 최예(崔汭) 선생이다.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에서 출생한 최예(崔汭) 선생은 조선 조 경주부 최초로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태조 2년 사마시로 등과해 면천 군수 등 고을 수령을 여러번 지냈다. 또 공직에 있는 동안 청백리로 녹훈되고 중직대부 성균관 사성을 지내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시대 병영을 둔 상무도시로 국가 안보에 충실했던 울산은 죽오 이근오, 반계 이양호, 수오 서석린을 배출했지만 타 지역에 비해 학문으로 입신한 문사가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학문에서 이들보다 앞서는 최예 선생이 지금까지 울산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태어나고 벼슬을 할 때 자란 두서면 활천 지역이 옛날에는 경주 소속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경주향교에서 발간한 <연계안(蓮桂案)>에는 최예 선생이 경주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두서면 활천 지역은 대한제국 광무 10년(1906) 외남면이 경주로부터 분리되어 경상남도 울산군에 속하면서 최예 선생도 자연스럽게 울산 사람이 되었다. 이후 그를 울산사람으로 보고 울산지역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있었지만 활발하지 못했다.

2001년 발간된 <두서면지>는 최예를 활천리 사람이라고 표기해 놓고 ‘문창후 치원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파조이다. 태조 2년(1393)에 사마시로 등과해 고을 수령을 맡는 등 치적이 컸다’ 고 정리해 놓고 있다.

이런 행정적인 변화로 태어날 때는 경주인이었지만 나중에 울산사람이 되어 활발한 문사 활동을 펼친 인물이 울산에는 적지 않다.

죽오 이근오 선생도 <연계안>에는 경주에서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던 인물로 기록해 놓고 있지만 지금은 울산을 대표하는 조선 시대 문사가 되어 있다.

울산사람들에게는 ‘백련정’ 때문에 잘 알려진 도와공 최남복도 비슷하다. 그가 태어날 때만 해도 백련정 일대는 경주 지역이었지만 이 지역 역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울산지역이 되어 요즘은 도와공을 경주인으로 보는 사람들보다는 울산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경주 최씨 후손으로 울산에서 문중 일을 많이 하고 연구해 온 최태림(62)씨는 “우리 문중의 경우 과거 경주에서 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경주 최씨라는 본을 갖게 되었지만 그동안 울산이 크게 발전하면서 조상들 중 울산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고 또 조선시대에는 과거 경주지역이었던 두서지역 일대가 울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울산인이 된 조상들도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또 “최예 선생의 경우 그의 산소와 그를 모시는 재실 전천재가 두서면 활천리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연구가 울산에서 더욱 활발해야 한다”면서 “울산시가 옛 시에 한 줄 밖에 언급되지 않는 전화앵에 대해서는 그의 무덤을 찾아내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면서도 최근 울산시가 금석문을 발간하면서 최예 선생의 글을 뺀 것은 울산으로 보면 귀중한 문화자산을 방치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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