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40) 울산연극과 영남여관

▲ 해방 후 연극 공연이 열렸던 울산 중구 병영의 영남여관 터. 장생포 출신의 김선줄씨는 자신이 창단한 ‘진달래 극단’의 연극 공연이 장생포에서 인기를 끌자 당시 하상면의 중심지였던 병영으로 와 이곳에서 오랫동안 연극을 공연했다. 당시 하상면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었던 이곳에 지금은 병영새마을 금고가 들어서 있다.

1930년대 울산서도 신파극 시작
해방후 애국투사들 주제로 공연
김선줄씨가 창단한 진달래 극단
병영 영남여관서 오랫동안 공연
후에 영화상영·선거본부로 사용
한때 성황 누리던 울산지역 연극
60년대 영화관 들어오자 사양길
2000년 전국연극제로 반짝 인기

인간은 배우고 세상은 무대’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연극 속에 인생의 희노애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의 역사를 말하면 울산은 뿌리가 깊다. 1930년대 이미 중앙의 영향을 받아 최석보, 임명환, 손진상, 송영돈, 박영애, 오흥조, 김석경, 박삼송, 천재동 등 청년들이 신파극을 시작했다. 당시 신파극은 북정동 청년회관, 성남동의 구 주리원 백화점 터와 울산세무서 그리고 현 옥교동 유미 빌딩이 있는 니시다니(西谷) 집에서 열렸는데 연극이 무대에 오르면 도심은 물론이고 언양과 방어진 등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해방 후에는 범곡(梵谷) 김태근(金兌根)이 이끈 극단이 울산 도심과 농어촌 마을을 돌면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해방 전후 울산에서 연극이 가장 성행했던 곳이 장생포다. 장생포에서는 김용과 마을 청년들이 수협창고를 빌려 연극 무대를 만들어 놓고 ‘항구의 일야’와 ‘선창’을 공연해 마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무렵 농촌에서는 추석과 정월 대보름 등 일 년에 두 번 정도 연극을 공연했는데 배우가 마을 사람들이다보니 연극이 공연되는 날은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작품 내용도 해방 직후가 되어 일제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애국투사들의 삶과 가난한 가정생활의 비극이 주제가 되었다.

방송인 김삼일씨가 대경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해방 후 장생포에 살면서 먼발치로 연극을 보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1983년 포항에서 지방 시립극단을 창단 했는데 극단 창단에는 어린 시절 그가 장생포에서 보고 익힌 연극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장생포 출신 연극인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선줄이다. 김씨는 당시 장생포에서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시맨스클럽을 운영하면서 연극을 좋아해 ‘진달래 극단’을 창단했다. ‘진달래’는 김씨의 예명으로 이 극단은 장생포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울산전역을 순회 공연했는데 특히 병영 공연이 유명했다.

김씨는 당시 하상면사무소 인근에 있었던 영남여관을 세내어 여관 마당에 무대를 차려 놓고 오랫동안 연극을 공연했다. 영남여관은 이를 계기로 병영의 문화공간이 되어 영화까지 상영했는데 1954년 3대 총선 때는 정해영 국회의원 후보가 이 건물을 개조해 선거본부로 사용하더니 지금은 이 자리에 병영새마을 금고가 들어서 있다.

해방 후 울산에서 인기가 있었던 극단이 ‘벙어리 악극단’이었다. 이 극단은 벙어리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창단되었는데 김석경 등 울산의 연극인들이 외지에서 초청해 울산극장에서 공연을 해 히트를 쳤다.

김석경의 아들 지수(75)씨는 “해방 직후만 해도 연극인들이 대중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지역 어른들은 연극인들을 ‘광대’라 부르면서 하대하는 바람에 연극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연극 공연은 학교에서도 활발했다. 울산공고는 50년 대 구연재 음악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김봉희가 ‘햄릿’ 역을 잘해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 무렵 울산제일중학교에서 공연되었던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도 시민들의 극찬을 받았다. 남창중학교는 개학 첫해에 학생들이 이원영 선생의 지도아래 유치진 작품 ‘구술아기’를 무대에 올리고 다음해에는 ‘처녀성’을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공연했다.

이중 특히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호응이 좋아 청량초등학교와 온산초등학교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당시 남창 연극반 학생들은 연극 연습을 위해 학교에서 합숙까지 했는데 여학생들이 합숙을 할 수 없다보니 낙랑공주 역을 나중에 울산의 중진 방송인이 되는 남학생인 이부열(80)씨가 맡아 열연을 했다.

이처럼 한때 성황을 누렸던 울산연극이 사양길에 들어 선 것은 60년대 울산에 영화관이 많아지면서다. 이때부터 연극 관객들이 영화관으로 모이다보니 울산의 전통 문화였던 학교 연극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울산 연극인들이 요즘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오랫동안 연극 공연의 단절로 중앙으로 진출한 연극 선배가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동안 울산이 겪은 연극 침체와 무관치 않다.

지난 5일 폐막된 ‘제21회 울산연극제’에서 극단 푸른가시의 ‘더블웨딩’(연출 전우수)이 대상과 희곡상, 우수연기상까지 받았다.

푸른가시는 올해로 창립 30년이 되어 인간의 나이로 보면 장년에 들어서지만 아직 울산의 열악한 연극 환경 때문에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환경은 다른 극단도 마찬가지다. 울산에는 현재 푸른가시, 울산, 세소래, 무, 광대, 하얀코끼리, 씨어터예술단이 있지만 이들 중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번 대회에 아예 참석하지 못한 극단도 있다.

흔히들 배우·무대·관객이 연극의 3대 요소라고 말한다. 그런데 울산 연극인들은 울산은 무대만 있고 배우와 관객이 없다고 역설한다.

울산에서 연극 공연이 반짝했던 때가 있었다. 2000년 제18회 전국연극제가 울산에서 열렸을 때다. 이 때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관객들이 줄을 서 연극제 표를 샀고 일부 공연은 표가 사전에 매진되기도 했다. 울산에서 이 때 전국연극제가 열릴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울산 출신으로 당시 문예진흥원 감사로 있었던 최해조(75)씨의 노력이 컸다. 당시 전국 연극제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도시가 대구와 대전이었고 울산은 아예 경합에서 빠져 있었다.

이 때 최 감사가 울산 연극의 활성화 차원에서 아직 연극 인프라가 없는 울산에 전국대회가 열려야 한다고 역설했고 당시 차범석 문예진흥원장이 차 감사의 이런 건의를 받아들여 울산에서 처음으로 전국 연극제가 개최되었다. 최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울산은 오랫동아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 했지만 그때만 해도 타지 사람들이 울산을 공해와 노동자의 파업 등 부정적인 이미지만 갖고 있어 연극을 통해 울산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 이런 건의를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두동초등학교 출신인 최씨는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가 열릴 때마다 배우로 활동했다. 최씨가 어린 시절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북에서 온 이호순 선생이 학생들에게 연극을 열심히 가르쳤기 때문이다.

전국대회가 울산에서 열렸을 때 울산 연극인들은 그동안 침체 속에 있었던 울산연극이 르네상스를 맞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환영했다.

그런데 울산 연극은 전국 연극제가 끝난 후 다시 관객을 잃었다. 울산 연극이 이처럼 활기를 잃은 것은 연극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울산 연극을 대표하는 전우수 연출가는 울산 연극계에 할 말이 많다. 그는 울산 연극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대학 문화의 활성화와 젊은이들의 연극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외지인들은 울산에 노동자들이 많아 도시문화가 활달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연극계에서 보면 울산은 죽은 도시입니다. 울산에는 젊은 노동력은 있지만 정작 젊은이들이 품어내는 문화 에너지가 없습니다. 이러다보니 연극과 음악·문학 등 예술이 활성화 되지 못하고 이런 결과는 문화 인력의 부재로 나타나 수준 높은 예술 공연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는 또 “공연예술은 돈이 힘인데 오늘날 울산 연극이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울산 연극인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응모를 하지만 그나마 작품이 선정될 때 겨우 연명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반평생을 연극에 바친 전씨는 연극에 대한 자괴감이 크다. 그는 울산의 척박한 연극 토양을 볼 때 울산에서 전국연극제가 열렸고 또 5~6개의 극단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시세로 보면 울산보다 훨씬 작은 거창군이 오늘날 문화도시로 각광을 받는 것은 매년 여름 개최하는 국제연극제 때문이다. 거창의 매인 브랜드로 3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축제에 그동안 700여개의 국제 연극단체에서 2만5000여명의 국내외 연극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전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거창처럼 거대한 연극도시는 아니더라도 해방 전후 농어촌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울산의 연극을 이어 갈수 있는 방안이 없는지 답답해진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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