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수진 울산중앙여고 교사

“좋은 교사가 되긴 틀렸다. 아이들을 혼냈다. 여기서 가만히 있는 건 직무유기다.” 2010년 4월의 일기가 싸이월드의 ‘투데이 히스토리’ 알림으로 왔다. 학성여고에 근무하던 첫 해 우리 반 아이들이 만우절이라고 장난끼가 발동해 단체로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 친 사건에 대한 것이다. 이 때 나는 반 분위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깐깐하게 굴었고 아이들과 마찰이 심했다. 교사로서 부끄러운 흑역사이지만 나를 돌아보게 했다. 지금 나는 상처받아 일기를 쓰며 위로받지 않아도 될 만큼 반 아이들이 예쁘기도 하고 나도 성장해서 이 정도의 일은 거뜬히 해결할만한 연륜을 갖춘 교사가 되었다.

일기는 한자로 날 일(日)과 기록할 기(記)로 이루어진다. 말 그대로 그 날의 기록이다. 나의 일기에 대한 역사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한번은 담임 선생님께서 오늘 우리 반에서 제일 잘 쓴 일기라며 학급의 모든 아이에게 읽어주시며 칭찬을 해주셨다. 이후 자발적으로 일기를 썼고, 지금도 간혹 일기를 쓴다. 2004년 거제도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했었다. 섬마을 선생님으로 시작한 사회 초년 시절이었지만 거제도는 유배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고시 낙방생이었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야말로 백수(白手:하얀 손·손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뜻)였다. 그 때 힘이 되어준 건 일기였다. 일기는 그 누구보다 의지할만한 장소였다. 그리고 가슴 놓고 울 수 있는 비밀 공간이었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고시 낙방생의 낙담과 하소연을 말없이 받아 주는 벗이었다.

요즘 아이들을 살펴보면 일기를 쓰는 학생들이 많이 없는 것 같다. 하여 삶의 흔적과 생각들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길고 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개인적, 사회적으로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3년 전 책쓰기 동아리에서 4주간의 일기를 모아 책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 강제로 쓴 일기 이후 처음으로 써 본 일기라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일상에 대해 생각하는 법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법을 스스로 배우고 익혔다고 말했다. 또 매일의 일상이 글이 될 수 있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당연히 글은 일상이 소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 과정에서 각종 대회 때 말고는 글을 쓸 기회가 없기에 글은 훌륭해야 하고 위대한 생각을 품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아이들이 웬일인지 열심히 글을 쓰고 있어서 무엇인지 살펴보니 ‘윤사일기’였다. 2학년 ‘윤리와 사상’ 수업에서 그날 배운 것을 일기 형식으로 써서 제출한다. 멋진 시도여서 벤치마킹할 겸 살펴보았다. 수업 내용을 토대로 공자, 노자, 한비자의 사상을 스스로 비교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노자가 추구한 소국과민(小國寡民)은… 예(禮)를 거부한다는 점이 에러다. 예는 인간의 기본 도리이므로 예가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제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사상가의 사상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견주어 보는 시도가 좋았다. 수업 중에는 하기 힘든 활동인데 일기라는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선생님과 우리 아이들이 해내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역시 일기의 힘은 대단하다!

양수진 울산중앙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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