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울산인

▲ 세종실록 107권, 세종27년 2월23일 정묘 2번째 기사 부문. ‘울산군의 향리였다’로 시작되는 동지중추원사 이예의 졸기(卒記)에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일, 군수의 피랍, 벼슬 승진의 과정, 포로를 귀국시킨 정황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태조5년 울산군수 이은, 노략질하러온 왜구에 포로로 잡혀가
이때 젊은 향리였던 이예, 바다 가운데까지 뒤쫓아 군수 섬겨
이예의 충성과 배포에 왜구도 감명받아 2개월후 일행 풀어줘
43년간 조선의 대일외교관 활동…사후에도 ‘충숙’ 시호받아
최초의 조일 외교조약인 ‘계해약조’ 체결, 양국의 은인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역사의 보물창고다. 태조~철종 25대 472년간 매일 기록된 세계 최대의 단일 역사서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하다. 이에 버금가는 명(明)실록과 청(淸)실록이 있으나 각각 260년과 296년 간의 기록일 뿐이다. 기간 뿐 아니라 글자 수로도 비교되지 못한다. 일본은 더하다. 약 30년 간의 왕실사를 담은 <삼대실록>이 9세기에 편찬됐으나 이후로는 국가가 주도한 정사(正史) 기록물이 없다. 이처럼 소중한 우리 기록물 속에 울산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담겨 있을까.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사연으로 한 세상을 살다갔을까. 조선왕조 울산 실록은 이같은 궁금증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울산과 관련 해 실록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건은 무엇일까. 또 최초의 울산인은 누구일까.

최초의 사건은 1396년(태조5) 11월17일이다. 왜구가 울주(울산) 지역을 침범하니 군수 이은(李殷)이 병사를 독려해 왜구 6급(級)을 벤 사건이다. 이은은 ‘영천인’으로, 영천이씨 감사공파의 시조이다.

실록의 최초 울산인은 그 보다 한달 뒤인 1396년(태조5) 12월에 등장한다. 왜구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 그날의 이야기는 1397년(태조6) 1월3일, 1월28일 두 번에 걸쳐 상세히 기록됐다. 최초의 울산인 이예(李藝·1373~1445)는 바로 그 장면에 등장한다. ‘왜구의 괴수 상전어중 등이…이은과…기관 이예 등을 잡아서 도망해 돌아갔다’(倭寇魁相田於中等…執殷及…記官李藝等逃歸).

 

그런데 그날의 이야기는 세종실록에서 또다시 언급된다. 쳐들어온 왜구수는 3000명에 달했다. 그런데 조선초 울산의 인구는 4161명, 군사는 500명에 불과했다. 마음껏 노략질한 왜구는 군수 이은을 포로로 붙잡아 대마도로 돌아갈 차비를 차렸다. 이예는 울산 동헌에서 근무하던 24세의 젊은 향리였다. 1445년(세종27) 2월23일 실록기사에는 “울산의 여러 아전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는데, 이예가…관아에서 쓰는 은그릇을 가지고 왜적의 배 뒷 행비에 붙어 타고 바다 가운데까지 뒤쫓아 가서 이은과 같은 배에 타기를 청하니, 적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이를 허락했다”고 돼 있다. 선단이 큰 바다로 들어서자 그가 몸을 드러내며 이은 군수가 탄 배로 옮겨주기를 청했고, 그의 충성과 배포에 감탄한 왜구 두목이 이를 허락한 것이다.

대마도에 도착하자 그는 가져온 은그릇으로 몸값을 바쳐 일행의 죽음을 면했다. 왜구 몰래 군수를 쉬게 하고 날마다 2인분의 노역을 감당했다. 지성껏 군수를 섬기는 모습을 지켜보며 왜구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일행은 약 2개월 후 풀려나 귀국하게 된다. 목숨을 내놓고 군수를 쫓아갔던 향리가 마침내 군수를 구하여 돌아온 것이다.

이예는 고려말 1373년(공민왕22)에 울산에서 태어났다. 세종실록은 그가 여덟살에 불과했던 1380년(고려 우왕6)에도 왜구가 울산을 침입했고, 당시 그의 어머니가 왜구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까지 알려준다.

 

이예는 실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울산공무원이기도 하다. 군수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원이었으며, 단신으로 임지에 도착했다. 행정을 보좌할 인력이 함께 파견되지 않았고, 일상의 행정업무는 모두 향리의 몫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청 국장에서 주무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서비스가 향리에 의해 제공됐던 것이다. 이예의 직명은 기관(記官)이었으며, 그 임무는 관아의 문서와 장부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조선건국 5년 차인 1396년,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기도 전에 일어난 피랍사건은 국가에 큰 충격을 주었다. 태조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도절제사와 경기우도의 절도사에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두 사병으로 강등하고 수군에 편입시켰다. 반면 이예에게는 군수를 구해 온 충성이 가상하다 하여 벼슬을 내리고 관직에 임명했다. 이로써 그는 울산의 지방공무원에서 중앙공무원으로 변신한다. 신분도 향리에서 사대부로 바뀌었다.

실록에 처음 나타나는 그의 벼슬은 종5품 좌군부사직이었다. 울산군수가 종4품 벼슬임을 감안하면, 20대의 청년에게는 파격적인 중용이었다. 이후 그는 43년 간의 공직생활을 오로지 대일외교관으로 일관했다. 생전에 종2품 동지중추원사까지 승진했고, 사후에는 정2품 지중추부사로 추증돼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40여 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그 중 네 차례는 통신사로 임명돼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를 왕래했다. 어릴 적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일본의 여기저기를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살아서는 재회하지 못했다. 대신 왜구에 납치되어 가족과 생이별한 조선인 667명을 찾아내어 귀국시켰다.

그가 대마도주와 체결한 계해약조는 조선이 일본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그 목적은 본질적으로 왜구억제에 있었다. 태조~세종시대 60년간 왜구의 침입은 184회에 달했다. 그러나 계해조약 체결 이듬해인 1444년 이후부터 임란 때까지 왜구의 침입이 한 차례도 없었다. 그 자신 왜구의 가장 큰 피해자였지만, 왜구억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도 그였다.

왜구에게도 그는 은인이었다. 계해약조를 통해 해적질에 의존하지 않고도 조선과의 통교무역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마도에 세워진 ‘통신사 이예 공적비’에 새겨진 글귀가 이를 알려준다. ‘그로 인해 왜구가 진압되고 대마도에 밝은 시대가 도래했다’. 일본인이 쓴 비문이다.

▲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실록은 총 74회에 걸쳐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1445년(세종27) 2월23일 ‘졸기’는 그의 죽음을 고하며 그 일생을 조망했다. ‘동지중추원사 이예가 졸하였다. 그는 울산군의 향리였다’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일, 군수의 피랍사건, 벼슬 승진의 과정, 포로를 귀국시킨 정황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가 죽은 지 500여년이 지났지만 그 흔적은 지금도 울산에 남아있다. 울산시 중구 태화동에는 그의 유허비가 있다. 울산 동헌은 그가 기관(記官)으로 근무하던 현장이다. 앞으로 복원될 울산동헌객사는 그가 일본에 파견될 때마다 들렀거나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했던 곳이다. 울산의 남북을 잇는 동맥으로 지난해 부분 개통된 ‘이예로’는 그가 한양에서 일본을 향해 가던 통신사 옛 길의 우회도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하드웨어는 오늘의 울산이 그를 기억하게 도와주는 귀한 유산이다. 울산시와 중구가 ‘이예기념관’을 건립할 계획도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예의 업적과 정신세계를 울산 청소년에게 알려주는 콘텐츠가 축적되고 그 스토리텔링이 울산 문화의 깊이를 더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태조실록』 1396년(태조5) 11월17일. ○倭侵蔚州境, 知州事李殷督州兵斬倭六級, 賜綺絹。

『태조실록』 1397년(태조6) 1월3일. ○倭寇魁相田於中等, 率其徒入蔚州浦, 知州事李殷給糧厚待之。 相田等疑爲誘陷, 執殷及伴人朴靑、記官李藝等逃歸

『세종실록』 「지리지」 울산군條: 戶一千五十八, 口四千一百六十一。 軍丁, 侍衛軍十六, 鎭軍一百十六, 船軍三百六十八

『세종실록』 1445년(세종27) 2월23일. ○蔚之群吏, 皆走匿, 藝與記官朴遵齎其官銀酒器, 冀乘賊船之後行者, 追及海中, 請與殷同舟, 賊感其誠許之。

『세종실록』 1445년(세종27) 2월23일. ○初, 藝八歲, 母爲倭所虜。

『세종실록』 1445년(세종27) 2월23일. ○明年二月, 乃與殷還。國家嘉之, 免藝吏役, 授之官。

‘これにより倭寇が鎭まり馬に明るい時代がおとずれた’.

『세종실록』 1445년(세종27) 2월23일. ○同知中樞院事李藝卒。藝, 蔚山郡吏。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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