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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기획특집인물로 읽는 울산유사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297)]울산의 독립운동가인 문암 손후익·이재락과 사돈 맺어문화예술편 (41) 심산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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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29  23: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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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김창숙기념사업회’는 최근 심산의 독립운동과 관련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내용을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 책자 속에는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펼쳤던 심산의 얘기가 많다. 사진은 심산이 일제강점기 군자금 모금을 위해 울산에 오던 중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치자 그를 오랫동안 모시면서 돌보았던 범서읍 입암에 있는 문암 손후익의 집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대표했던 유림… ‘1차 유림단’ 사건 주도
아들 찬기가 손후익 딸과, 딸 덕기가 이재락의 아들과 혼인
심산, 요양차 범서읍 손후익 집·성안동 백양사에 머물렀고
독립군자금 모금에 나섰을땐 웅촌의 사돈 이재락 집 찾기도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가 <1920년대 유림의 독립운동과 심산 김창숙>을 출간했다. 이 책은 지난 해 연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 서거 55주기를 맞아 개최한 추모 학술회 내용을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유림이었던 심산은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우리나라 종교 지도자들이 3·1독립운동을 주도한데 반해 유림들이 빠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3·1독립운동 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내기로 하고 전국 유림들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 때 많은 유림들이 왜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고 심지어는 순국까지 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파리장서’가 실패하자 심산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짓기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왜경으로부터 14년 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책 내용 중에는 유난히 울산과 관련된 얘기가 많다. 심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울산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이런 인연으로 울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문암(文巖) 손후익(孫厚翼,) 이재락(李在洛)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이재락은 인물이 잘 나고 인품이 뛰어나 문중사람들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도 ‘율동어른’이라고 불렀다.

심산은 아들 환기·찬기·형기와 딸 덕기를 두었는데 이중 두 번째 아들 찬기가 문암의 딸 응교와 결혼했고 딸 덕기가 남창 3·1운동을 주도했던 ‘율동어른’의 장남 동립에게 시집을 왔다.

1888년 경주 강동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던 문암이 일제의 눈을 피해 울주군 범서읍 입암 마을로 온 것이 1925년이다. 문암 집안은 조부 최수가 신돌석 장군을 도와 의병활동을 벌였고 부친 진수 역시 항일운동을 펼쳐 가족전체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심산이 문암의 도움을 받은 것이 1925년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해 1차 군자금을 모우고 있을 때였다. 이때 군자금 모금을 위해 양산을 거쳐 울산으로 오던 중 언양에서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허리를 크게 다쳤는데 이 때 문암이 심산을 집에 모시고 간호를 했다.

심산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언양에서 내가 중상을 입어 두 달 가까이 대소변을 받아내어야 했는데도 손후익 부자가 전혀 귀찮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간호를 해주었다”고 썼다. 이런 인연으로 심산은 문암의 딸 응교를 며느리로 맞이했다.

응교가 심산 집으로 시집을 갈 무렵 심산은 대전형무소에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결혼 후 응교가 시아버지에게 처음 인사를 올린 곳도 대전형무소였다. 더욱이 응교가 시집을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찬기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가는 바람에 응교는 혼자 심산의 옥살이를 돌보아야 했다.

심산이 옥살이를 한 것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기 때문이다. 심산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한동안 병보석으로 출감해 울산 성안에 있는 백양사에서 요양했다. 심산은 백양사에서 요양 중에도 애국지사들을 만나고 한용운과 여운형 등에게 서한을 보내는 등 일제 몰래 독립운동을 펼쳤고 이 일을 응교가 도왔다. 심산으로 보면 ‘율동어른’ 이재락은 사돈이면서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율동어른’이 심산의 딸 덕기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때 심산은 독립운동 청원서를 들고 파리로 가기위해 상해에 머물러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이처럼 결혼식장에서도 대면을 못했던 사돈 둘이 처음 만났던 곳이 대전 유성온천이었다. 유성 온천은 일제강점기 공주갑부 김갑순이 운영했는데 둘은 왜경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율동어른’은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심산과 함께 군자금 모금을 위해 김갑순을 자주 만났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힘들었던 일이 군자금 모금이었다. 일제는 군자금만 끊으면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군자금을 제공하는 조선인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심산은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는데 20여만 원이 들것으로 판단하고 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국내 부호들이 협조하지 않아 겨우 5000원 밖에 거두지 못했다.

‘율동어른’은 스스로 군자금을 많이 내었을 뿐 아니라 심산이 국내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금에 나섰을 때는 함께 동행 했다.

‘율동어른’은 심산이 군자금 모금에 나섰을 때 1차로 200원을 내었고 나중에 800원을 더 내는 등 군자금 모금에 적극 협조했다.

당시 1000원은 논 10마지기를 살 수 있는 큰 액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이 나중에 왜경에 발각되어 ‘율동어른’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았다.

심산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율동어른’ 집을 처음 찾은 때가 1926년 2월이다. 책에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다. 책에는 이 무렵 심산이 차 사고로 다친 몸이 호전되자 웅촌의 사돈집을 찾았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심산이 시집을 갈 때도 상해에 있어 보지 못했던 딸 덕기를 잠시 본 것이 이 무렵이었다. 그런데 심산은 이 때 이미 왜경의 추격을 받아 부녀는 짧은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율동어른’의 아들 동립도 장인을 위해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동립이 부친과 장인의 뜻을 받들어 군자금 모금에 참여한 것이 1926년 초다. 이 무렵 문암과 ‘율동어른’이 동래 범어사 금강암에 모여 국내에서 모은 5000원의 군자금 사용처를 협의했는데 이 때 동립도 참석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모금한 군자금을 사업가 김종택에게 주어 중국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모금액이 너무 적어 기지 건설을 뒤로 미루고 우선 의열단에 넘겨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지 않은 친일 부호를 처단하고 국내에 있는 일제기관을 파괴키로 결정했다.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 직원을 사살하고 척식회사 건물을 파괴하는데 이 의거는 이런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울산에는 심산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펼쳤던 문암의 집과 백양사 그리고 ‘율동어른’ 집이 현존하고 있다. 자동차 사고로 허리를 다쳤던 심산을 문암 부자가 돌보았던 입암 집은 이웃의 이수은씨(95)가 구입해 지붕의 초가를 걷어내고 기와만 새로 덮었을 뿐 집의 뼈대와 형태는 옛날 그대로다. 그러나 이 건물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간판이 아직 없다.

심산이 대전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나와 요양 차 찾은 백양사도 최근 사찰이 중창되어 옛 모습은 아니지만 심산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심산이 이곳을 찾은 때가 1936년 3월로 지금부터 80여 년 전이다. 심산이 이때 요양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먼 울산까지 온 것은 동지면서 사돈인 손후익과 이재락이 울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산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여러 번 찾았고 딸 덕기가 시집살이를 했던 ‘율동어른’ 집도 아직 그대로 있다. 지금은 ‘울산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으로 불리는 이 집은 1997년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3호로 지정되었다. 백양사와 ‘율동어른’ 고택은 울산의 명소가 되어 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양사와 ‘율동어른’ 건물에도 안내판은 있지만 심산의 행적이 한 줄도 없다.

문암 집은 문암의 아들 석원이 어린 시절을 보내었던 곳이기도 하다. 석원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한문 실력이 출중해 박정희 정권 때는 청와대 민원 비서관으로 근무했는데 그의 아들 웅만(73)이 현재 서울 공덕동에서 살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언제가 이들 건물들은 사라지겠지만 심산을 비롯한 문암과 ‘율동어른’이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야기는 남아 있어야 한다.

멀지 않아 6월 ‘호국의 달’이다. 이때가 되면 또 다시 울산보훈처가 각종 애국 행사를 벌이고 울산시민들이 이들 행사에 호응해 애국을 소리 높이 외칠 것이다.

그런데 외지에서 울산에 있는 심산의 행적을 연구하면서 항일운동 심포지엄을 열고 책자를 만드는데도 정작 울산은 문암과 율동어른 그리고 백양사 건물에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한 줄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울산보훈처와 울산시민들이 울산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던 심산과 문암 그리고 ‘율동어른’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지가 궁금해진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지면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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