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하지왕은 꺽감이란 아명으로 숙위궁에서 질자 생활을 했었다. 숙위궁에는 고구려의 속국과 신국에서 올라 온 왕자와 볼모들이 고구려 숙위궁에 머물면서 황제를 호위하는 의장대에 편입되어 있었다. 숙위궁에는 신라의 내물마립간의 아우인 실성왕자, 백제 아신왕의 딸인 다해공주, 왜왕의 아들, 후연 모용성의 아들, 말갈, 거란, 숙신, 부여, 중국 북위의 자제들이 모여 질자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꺽감은 처음에는 고구려의 마방에 배정되어 말구종이 되었다. 말구종은 미천한 직이긴 하지만 말을 중시하는 고구려에서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광개토태왕은 명절 때마다 말을 검열하였고, 검열 때는 태왕과 태자, 후비빈들도 함께 찾아와 말을 구경했다. 꺽감은 왕족이 타는 말들이 탈이 없나 잘 살피고 조련하는 일을 하면서 신중함과 통솔력, 용맹무쌍함과 때를 알아차리는 분별력을 쌓아갔다.

거련 태자는 좌우에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늘 중심에 선 인물이었지만 거련은 얼굴이 희고 창백했으며 몸은 마르고 병약해보였다. 그의 용모나 걸음걸이 어디에도 광개토태왕의 적자로서의 위엄과 후광이 보이지 않았으나 눈만은 총명하게 빛났다. 거련은 무골이 아니라 문약해 보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거련은 건강을 회복하고 당당하고 지혜로운 소년으로 커갔다.

고구려 공주 상희는 공주답지 않게 선 머슴애처럼 구는데다 꺽감을 오빠라고 부르면서도 마치 동생처럼 다루었다. 상희는 꺽감에게 귀한 먹거리를 곰상스럽게 챙겨주고 값비싼 선물도 했다. 하지만 상희가 자기의 수말하고 마방의 암말하고 접을 붙여 망아지를 얻자며 부랄이 덜렁덜렁한 수말을 몰고 올 때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적도 있었다.

꺽감은 백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숙위궁에 자주 놀러갔다. 거기엔 볼모로 잡혀 온 백제공주 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결이 가무잡잡하고 성격이 보리처럼 억센 상희와 달리 다해는 얼굴이 해끔하고 피부가 쌀알처럼 투명하게 비칠 정도였다. 눈이 크고 다소곳해 질자로 끌려온 남자애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꺽감도 다해를 보면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다해는 늘 거련이 차지하고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지.’

꺽감은 볼모로 잡힌 고구려 땅에서 다해 같이 이쁘고 고즈넉한 소녀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쟁을 다루는 다해의 길고 가녀린 손가락이 줄 위에 뛰놀면 꺽감의 가슴도 마구 방망이질을 하며 뛰었다. 꺽감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연주하는 하늘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했었다.

‘아, 이 추운 고구려 땅에서 늘 찾던 가야의 따뜻한 집과 어머니의 품속을 이 쟁소리에서 느끼는구나.’

다해와 헤어질 때 꺽감에게 다가와 준비한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꺽감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얼얼했다.

 

우리말 어원연구

살피다. 【S】sarpi(사르피), sripita(스리피타), 【E】look into, observe.

보리. 【S】vrihi(브리히), 【E】barley. 우리말, 산스크리트어, 영어의 어원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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