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하지왕이 구투야에게 말했다.

“난 이 평양에서 태왕과 왕후, 태자와 질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냈소. 지금 다들 무얼하고 있는지?”

거련태자와 태자의 누이동생 상희, 백제공주 다해와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면서 인연을 쌓은 것은 행복한 경험이었다.

하지왕은 이들의 소식에 늘 목말라했다. 거련태자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해 언제라도 부왕의 보위직을 물려받아 거대한 고구려를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해도 질녀생활을 마치고 백제로 돌아갔다는 것을 풍문으로만 들었다.

지금은 신라왕이 된, 질자들의 맏형 실성군과의 만남은 꺽감이 고구려인이 아니라 가야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가야인이 아니라 고구려인이 되었을 것이다. 실성군은 신라로 돌아가 실성왕이 되어 낙동강 동쪽의 가야땅을 점령하고 지금은 낙동강 서쪽의 대가야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실성왕을 만나면 어떤 감정이 일어날까?

그러나 나름 평화로웠던 질자생활은 박지 집사의 밀고로 위기에 빠졌다. 박지는 꺽감이 소후 여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장화황후와 광개토태왕에게 알려 태왕은 왕명을 거역한 여옥과 수경, 꺽감을 죽이려고 했다.

때마침 한반도에 여가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꺽감 일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처형을 유보하고 직접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정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왕은 평양의 어린 시절을 회억하다 뚜벅 구투야에게 말했다.

“구투야 두령, 지금 생각해보니 여가전쟁은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소.”

“그럼, 왜 고구려군은 남하해 가야를 짓밟고 나의 온 가족을 죽이고 저를 산적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하지왕이 영마루에서 평양을 내려다보며 구투야에게 말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기 오래 전에 이미 평양궁과 아홉 개의 절을 짓고 평양 보기군을 외곽에 배치했소. 나도 질자들과 함께 평양으로 내려왔소. 태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작정이었던 것이오.”

“왜 광개토가 평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광개토대왕은 북방을 정벌한 뒤 한반도에서 같은 언어 같은 핏줄인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사국일통의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었소. 그래서 신라와 백제를 굴복시킨 뒤 우리 가야마저 친 것이오.”

광개토태왕으로서는 평양이야말로 풍부한 남부의 병사와 물자를 징발해 남하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왕은 평양 남쪽에 군사적 전진기지인 6성을 쌓고 징발한 군을 주둔시켜 언제든지 남방원정에 투입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헌데 울고 싶자 뺨맞는다고 때마침 금관가야가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공격했고, 고구려군은 신라의 구원요청에 마지못해 부응한 것처럼 남진해와 마침내 금관가야를 점령하고 사국일통의 꿈을 이뤘던 것이다.

 

우리말 어원연구

절. 【S】dri(드리), 【E】worship. ‘절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절’(temple)이 나왔고, 고어로는 ‘뎔’이다. 일본어로는 ‘데라’, ‘dri(드리)’와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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